【야마시타 미치요 칼럼】한강 작가를 통해 되살아난 '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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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를 통해 되살아난 '제주 4·3 사건'

작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 그의 인기는 높고 수상 작품 이외의 소설도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한국 사회에서 잊혀져가던 '제주 4·3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일본에서 재일동포가 가장 많이 산다는 오사카에는 특히 제주도 출신 동포들이 많은 편이다. 일제시대 때 오사카-제주 왕복선 '기미가요 마루'가 운행되었던 것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로 떠난 사람도 많았는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8년 '제주 4·3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군정이 실시하고자 했던 '남조선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기폭제가 되었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함에 따라 잠시나마 광복의 기쁨을 누렸던 조선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북쪽은 소련군, 남쪽은 미군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남조선 단독선거'를 실시하려고 했다. 예로부터 하나였던 조선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두 개의 정부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통일독립'을 바랐던 제주도민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주민의 정체성

제주도민 중에는 일제 때 일본에서 일한 사람들이 많아 해방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귀향했다.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6만명이 돌아왔다고 한다. 일본에서 민족 차별의 서러움을 맛본 그들은 해방 이후 교육을 바로잡아 자주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자치와 교육에 전념하며 그들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나중에 제주인민위원회가 되었다. 좌파조직이 아니었으며 미군부대와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주민들은 '배워야 한다'며 자발적으로 학교를 세웠다.

미군 통치하의 선거

해방 후 미군 통치로 인하여 통일독립 정부의 꿈이 멀어져 가는 가운데 1947년 3·1절을 계기로 '통일독립을 성취하자'라는 슬로건 아래 전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떨쳐 일어났다.

제주에서도 3·1절 기념식에 많은 도민들이 참가하여 행사를 마친 뒤 시위를 벌였다. 이때 기병이 탄 말에 어린 아이가 치었는데 이를 못 본 채 그냥 지나치자 주변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에 당황한 경관이 민간인에게 발포했다. 이로 인해 갓난아이를 안은 여인과 초등학생 등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미군과 경찰은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제주에서는 4·3사건의 발단을 이때부터라고 말한다.

이를 계기로 미군정과 경찰에 반감을 품은 제주에서 대대적인 총파업이 일어났다. 제주도청을 비롯한 관공서, 학교, 민간 점포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관민합동 총파업이 발생하자 '제주도민 90%가 좌익' '레드 아일랜드'라는 낙인이 찍히고 이를 남로당*의 선동으로 판단한 미군정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시위 주모자를 비롯한 많은 도민들이 검거·구속되고 고문당했다. 3.3평의 좁은 감방에 35명이나 갇혀 앉지도 못한 채 감옥생활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다가 고문사하거나 옥사한 사람도 있었다. 4·3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1년 동안 약 2500명이 검거되었다.

(*남노당은 남한에서 조직된 좌익조직으로 미군정에 반대하여 여수·순천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주 고위관리직에 극우 성향이 강한 사람이 임명되자 서북청년회*라는 극우청년단이 제주도로 들어와 경찰·행정·교육기관을 장악하고 '빨갱이 사냥'이라며 주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테러를 일삼았다. 그런 와중에 일본으로 밀항하는 자, 한라산 동굴로 들어가 숨어 사는 자들도 나타났다.

(*서북청년회는 북한과 소련군의 사회주의화 정책, 지주들의 토지 몰수와 자본가의 자산 모집 등에 불만을 품는 청년들이 탈북하여 남조선에 조직한
반공단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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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월 유엔에서 '가능지역 총선거'가 결정되자 38도선 이남의 총선거를 강행하려는 미군정에 남조선 전국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급기야 전라도·경상도에서 경찰서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제주 4·3사건' 발발

제주도 남조선노동당 소속 청년들도 만일 탄압을 한다면 항쟁할 수밖에 없다며 1948년 4월3일 아침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국가 수립을 막는 5·10 단독선거에 반대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어 무장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이것이 소위 '제주 4·3사건'이다.

본토에서도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미군은 경찰을 늘리고 서북청년단 500명을 추가로 파견했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미군 장관은 무장대 리더와 평화협상을 시도했지만 누군가의 방화를(후일 경찰의 지지를 받는 우익청년단의 소행으로 판명) 계기로 미군정은 무력에 의한 진압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5·10선거는 제주도민들의 거부로 결국 무산되었다. 6·23재선거를 실시했으나 선거 전 '선거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6000명의 청년들을 검거하여 교정에 지은 임시 텐트에 수용했다. 결국 6·23재선거도 실패로 끝났다. 1945년 8월15일 제주도만 선거를 거부한 채 대한민국 이승만 정권이 탄생했다. 이어 9월9일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북한 정권이 탄생하여 통일민족국가 수립은 이뤄지지 않았다.

제주 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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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보이콧한 제주민에 분개한 미군사령관과 이승만 정권은 '초토화작전'을 결정하고 10월 17일 '해안선에서 5km 이상 내륙으로 들어가는 자는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한다'고 공포했다. 국제법으로 금지된 '초토화작전'이 실시되자 제주 면적의 80%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비무장한 민간인을 상대로 대대적인 총살이 자행되었고 식량으로 쓰이는 소·돼지·말 등 가축들도 도륙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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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발령되자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마을 주민들이 게릴라 부대를 원조하고 편의를 도모한다는 가정 하에 마을 주민들을 집단학살한다'는 계획이 채택되었다. 400명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북촌마을 학살사건'도 이때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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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후일 한라산으로 도망쳐 숨어 있던 주민들에게 '하산하면 살려 준다'는 사면계획이 발표되자 80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하산했는데 대부분 어린이와 노인여성이었다. 그러나 약속을 깨고 유격대에 협조한 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은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범죄와 개연성이 있어 보이는 자를 미리 수용소에 잡아 넣고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친 뒤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사형·무기형·징역 15년을 언도했다. 수용소가 모자라 대전 등 본토 형무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주정공장에도 민간인 3000명이 수용됐다. 가혹한 고문과 열악한 환경으로 사망하는 자, 시설 내에서 출산하는 임산부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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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남하할 수밖에 없게 되자 본토 감옥에 수감돼 있던 수형자들을 잇달아 집단 처형됐다. 제주시·모슬포·서귀포 등 네 곳 감옥에도 수 백명씩 수용되었으나 계엄사령부에 의해 학살되었고 수용소의 수감자들도 발에 추를 단 채 바다에 던져져 수장되거나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어 밀매장됐다.

1954년 9월21일 경찰이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함으로써 1947년 3.1발포 사건 이후 7년 7개월 만에 4·3사건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사건 이후에도 아물지 않는 상처

2003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4.3사건의 인명피해는 2만5천명~3만명으로 추산되나 2021년 보고서에 의하면 희생자 수는 14,533명 가량이다. 도민 8분의 1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어 약 3만명~8만명이 희생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사건 당시 대마도에 수많은 시체가 떠내려왔는데 게중에는 손목이 묶인 시체도 있었다고 한다. 떠내려온 시신들은 대마도민에 의해 매장되고 위령제가 열렸다.

또한 1만여 명이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하며 대부분 오사카 주변에 살고 있다. 목숨 걸고 밀항하던 중 배가 침몰해 죽은 사람도 있었다. 밀항에 성공하여 일본에 살고 있다고 해서 고통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숨어 살며 살아 남은 자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왔다. 혹한에도 굴하지 않고 화려한 꽃을 피우며 강인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동백꽃은 제주 4·3의 상징이 됐다.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이승만 정권 이후 군사정권이 계속되면서 금기사항이 되었고 오랫동안 '북한 공산당이 일으킨 폭동'으로 왜곡되었다. 오랜 세월 희생자와 유족들의 비통함은 어둠속에 묻혀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민주화 열기가 고조됨에 따라 4.3사건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1999년 김대중 정권 때 드디어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하여 제주도민과 4·3 희생자 유족들 앞에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진상규명과 보상문제가 해결을 향해 진전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강대국 미국이라도 과거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책임을 다할 때가 올 것이다. 지금 한강 씨의 소설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그들의 존재를 잊지말아 달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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