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시타 미치요 칼럼】'여성다움'이란? 미치코 황후의 '다리를 놓으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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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동경하는 사람 중에 미치코(美智子) 상황후가 있다. 아키히토 전 천황의 부인이다. 필자는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미치코 황후의 이름을 본따 필자의 이름을 지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지금껏 미치코 황후를 특별히 의식해본 적도 없었고 가끔 TV에서 황실앨범이나 뉴스를 통해 품위 있고 우아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은 정도였다.

필자가 조금 성숙한 후로는 누구한테나 상냥한 미소로 화답하며 화기애애한 두 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 멋진 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언젠가 동경으로 바뀌었던 모양이다. 최근 필자가 '여성' 또는 '여성다움'이란 무얼까란 주제를 놓고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인물은 바로 미치코 황후였다. 동경이 이상으로 바뀌고 차츰 존경심으로 바뀌었던 모양이다.

3년 전 필자가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는 마침 연호가 '헤이세이(平成)'에서 '레이와(令和)'로 바뀌어 '황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그와 관련된 서적들이 다수 출판되었는데 미치코 황후에 관한 책들도 많았다. 그 중 '다리를 놓으며'라는 책이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미치코 황후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신과 주변 사이에 하나씩 다리를 놓으며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를 깊이 다져나가고, 그것을 자신의 세계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 다리가 놓이지 않거나, 놓였더라도 다리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거나, 때로 다리를 놓을 의지를 상실했을 때 사람은 고립되고 평화를 잃게 됩니다. 이 다리는 밖으로만이 아니라 안으로도 향하여 나와 내 안의 나 사이에도 끊임없이 계속 놓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아를 확립해 나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치코 황후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다리를 놓으며 그 다리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소중하게 간직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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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IBBY뉴델리 대회 기조연설

'다리를 놓으며―어린 시절의 독서 추억'이라는 소제목이 달린 이 책은 1998년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국제아동도서평의회(IBBY) 제26회 세계대회 개회식 기조연설(아쉽게도 직접 참석하지 못해 비디오로 진행되었고 시간 관계상 일부만 방송됨)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IBBY 50주년 기념대회 개회식 축사(축사는 영어로 했음)를 한 권으로 엮은 것으로 여기서 그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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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전몰자 기도를 마치고

'어린이책을 통한 평화'라는 주제로 열린 인도대회에서 미치코 황후는 어린 시절의 독서 추억 가운데 자신의 생각이나 감성의 기틀을 형성했던 독특한 작품들에 대해서 언급했다. 황후는 어린 시절의 독서 추억이 자신에게 뿌리를 부여하고 날개를 달아 주어, 그 뿌리와 날개가 안팎으로 다리를 놓으며 자신의 세계를 차츰 넓히고 가꾸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필자는 연설문을 읽고 미치코 황후의 인격의 뿌리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것이 여성스러움의 원점이 아닐까라는 느낌도 받았는데 그런 느낌을 특히 강하게 받았던 내용에 대해서 기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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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슬픔

첫 번째는 니이미 난키치(新美南吉) 작가의 '달팽이의 슬픔'(でんでんむしのかなしみ)이라는 책이다. 어느 날 달팽이는 자신의 등 껍질 속에 슬픔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친구를 찾아가 더 이상 살기 어려울 것 같다며 짊어진 자신의 불행을 한탄했다. 그러자 친구는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내 등 껍질 속에도 슬픔이 가득 차 있다"고 대답했다. 작은 달팽이는 다른 친구들을 찾아가 호소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다. 결국 달팽이는 슬픔이란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며 이를 극복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세한탄을 그만뒀다는 얘기다.

어릴 적 황후는 달팽이가 더 이상 신세한탄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결말에 단순히 '아아, 잘됐다'라고 생각했으나, 차츰 나이가 들면서 "껍질 가득 슬픔이 쌓여 있어 더 이상 살기 어렵다고 생각한 달팽이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아, 잘됐다'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사는 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라며 뭔지 모르는 불안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기쁨과 행복 뿐만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도 함께 보듬고 살아야 한다는 삶의 자세를 배우고 그런 고뇌를 앎으로써 자신 뿐만 아니라 상대방,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감싸안을 수 있는 마음의 싹이 되었던 것 같다. 공무에 있어서도 수많은 만남 가운데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모습에서 감싸고 배려하는 자애의 심정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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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는 오토타치바나히메

또 하나는 초등학생 시절 소개(疎開: 2차대전 말 농촌 피란생활)하던 무렵에 읽었던 일본 신화와 전설에 관한 얘기다. 당시 역사 교과서에는 신화와 전설이 실리기도 했는데 그와는 별도로 아버지가 구입한 일본의 여명, 즉 민족의 유년기와도 같은 고대 신화와 전설에 관한 책들이다. 그런 신화와 전설에 대해 "한 나라의 신화와 전설은 정확한 사실은 아닐지 모르나 그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나라와 지역 사람들의 자연관, 생사관, 그리고 무엇을 존중하고 두려워하며 어떤 상상력을 갖고 있었는지 알게 해 주고 자신의 가족 외에도 민족의 공통 조상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뿌리와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들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야마토 타케루 황태자와 그의 아내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야마토 타케루 황태자가 아버지 천황의 명을 받아 원정을 나갔다가 싸움에서 이기고 개선하자 아들의 힘을 두려워한 천황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다시 원정을 떠난 황태자는 가는 도중 거센 폭풍을 만난다. 이 때 동행하던 아내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스스로 바다에 뛰어 들어 해신의 분노를 진정시킬 테니 기필코 사명을 완수하여 천황께 다시 진언해 달라며 물속으로 뛰어든다. 이 때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아름다운 이별가를 부르는데 수일 전 황태자와 들판을 지나다가 적으로부터 화공을 당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일을 회고하며 "그 때 불 속에서 제 안부를 염려해 주신 그대"라며 황태자의 상냥한 마음씨에 감사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미치코 황후는 이 에피소드를 놓고 '산제물'에 관련된 얘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다른 희생과는 달리 타치바나의 언동으로부터 타케루와 함께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어떤 의지와도 같은 것이 느껴져 너무나 아름다웠다"며 "타치바나가 '희생'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인생 가운데 가장 사랑과 감사에 충만했던 순간의 추억을 노래하는 모습에 감명을 넘어 강한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또한 "타치바나의 얘기는 오늘날에도 통하는 상징성이 있고 사랑이라는 것은 때로는 가혹한 형태를 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과 희생이라는 두 가지가 자기 자신 속에서 가장 가까운 것으로, 하나로 느껴지는 신비한 체험이었다"며 "그 아름다움이 나를 사로잡음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위압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필자 또한 이 책을 통해 타케루 황태자와 타치바나에 대해 알고 나서 너무나도 강하게 묶여진 사랑 얘기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타치바나를 통해 본연의 여성다움이란 무엇이고, 서로 믿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열' '부부의 사랑'이란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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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의 미치코 상황후

아직 어린 마음 속에 이처럼 강한 사랑의 힘이 새겨졌던 것이 미치코 황후의 마음 속에 '열'이라는 강한 애정의 싹을 틔우고, 이처럼 강한 사랑이 있었기에 사랑과 희생에 대한 개념과 각오 같은 것이 준비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강한 사랑의 정을 갖고 있었기에 평민에서 프린세스로, 황실이라는 큰 벽을 넘어 천황을 보필하며 온갖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황후로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받는 사랑스럽고 금슬 좋은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이리라. 미치코 황후의 마음 속에 이처럼 강한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이 마냥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또한 이같은 강렬한 사랑은 그 강렬함을 느낄 수 없는 봄날의 온화한 햇살처첨, 온화한 봄바다처럼 우리들을 감싸고 평화를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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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미치코 싱황후

연설문에는 다른 독서 추억도 함께 소개돼 있었는데 필자는 특히 이 두 가지 에피소드 속에 황후의 인격의 뿌리를 형성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고 느껴졌다. 어린 시절 만난 여러 책들 가운데서 또한 전시 중 소개(疎開) 생활이라는 한정된 환경 속에서 책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런 얘기들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러한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과 마음의 그릇이 천성으로서 갖춰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책들과의 만남을 통해 미치코 황후가 느꼈던 생각들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운명적인 인생의 전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뿌리가 있었기에 평민으로부터 황태자비라는 지금껏 없었던 특별한 입장에서 우리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생과 시련을 극복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황후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다음은 IBBY 스위스 대회 인사말에서 인용되었던 시이다.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의 뺨에
어머니여 절망의 눈물을 흘리지 말라
그 뺨은 붉고 작다.
지금은 단 하나의 복숭아에 불과해도
언젠가 인류를 위한 싸움에서
불타고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중략)
단지 자신의 나약함과 낯설음 때문에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의 뺨에
어머니여 절망의 눈물을 흘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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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방문시(소아발달센터)

그리고 연설 가운데 "빈곤, 분쟁을 비롯한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그저 불쌍하다고 아이들 위에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수많은 슬픔과 고통을 극복해온 아이들이 새로운 지혜를 발휘해 그들의 미래 세계를 열어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어려움을 극복한 그들 속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을 믿어 보자"라고 호소했다. "미래를 향해 날아가려는 아이들 위에 불안하고 나약한 어머니의 그림자를 드리워서는 안 된다. 그 아이들의 미래는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시는 아이를 키울 무렵에 읽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황후의 어머니다운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모성애! 어머니의 강함, 그 강함으로 나라의 어머니로서 걸어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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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좋게 춤추는 천황 부부

이 책을 통해 사람으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갖춰야 할 자애와 정열, 모성애와 같은 여성다움의 본질들을 미치코 황후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황후는 자신에 대한 말은 안 했지만, 그 인간됨은 황후를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으며 이제는 그들이 증인이 되어 증언해 주고 있다.

황후는 황실이라는 전통적으로 격식이 높은 세계에서 그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개혁해 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천황을 곁에서 보필하며 자신의 맡은 바 책무를 다하려 애썼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은 늠름한 기품과 우아함, 상냥함이 넘치는 모습이나 언동은 인위적으로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심정의 세계가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여성다움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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