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3국에서 살아야 하는가?
평범한 서른살 한국인 청년 최중호. 그는 대학교 시절 탈북자를 만나 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지만 군복무와 제대 후 바쁜 일상에 탈북자에 대한 생각은 멀어져갔다. 3년간 방송국에서 일하다 런던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한 탈북자를 만난다. 왜 그들은 북도 남도 아닌 제3국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부적응'이나 '선진국 복지' 또는 '차별 때문에' 대한민국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권력의 정치적 동원, 공안기관의 감시, 탈북자라는 낙인 등으로 한국사회에서 희망을 잃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국가 권력은 야누스 같은 존재였다. 높은 수준의 물질적 보상은 제공됐지만 절대 공짜가 아니었다. 국정원 댓글사건, 세월호집회 반대 알바 등 불법적이고 반민주적인 행위를 수행하도록 동원되었다.
데모 같은 데 가면 돈 줘요. 탈북자들이 원해서 데모를 하는게 아니고 다 보수단체에서 돈을 줘요. 한국 사회가 나쁜 게 뭐냐면 자꾸 이용하는 거예요. 무슨 법인 만들어라 이렇게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거의 70여 개나 법인으로 등록을 했다는데, 관변단체지. 국가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거야. 왜냐하면 거기서 돈을 받으니까.
세월호사건 반대 집회의 경우는 5개월 동안 39회에 걸쳐 연인원 1,259명이 동원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에겐 1인당 2~3만원의 수당이 제공되었고, 국정원 댓글 알바 같은 경우에는 한 달에 5만원의 수당이 제공되었다.
유리벽에 갇힌 삶
탈북자가 유리벽에 갇혀 있는 현실이야말로 한국 사람보다 몇 배나 높은 탈북자들의 자살률을 초래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느끼는 유리벽은 공안기관의 지속적인 감시다. 2015년 상반기의 사망자 대비 자살률은 한때 15.2%에 달하기도 했다.
탈북자들은 유리벽 속에 살아요. 숨 막히게 숨 못 쉬게 유리벽 속에 가둬놨거든. 유리창 깨고 나가면 또 유리창이 있어요. 죽기 살기로 여기 와서 답 못 찾아요. 일자리가 없어요. 우리를 받아주는 데가 없으니까. 그런데 행사에 동원되면 돈 받아요. 무슨 행사인지도 몰라요. 탈북자동지회, 북한민주화위원회, 숭의동지회 등이 대표적인 정부 관변단체인데 여기로 정부 예산이 들어와요. 탈북자들은 댓글 알바도 잘하는데 이념이 없어요. 자, 이제부터 무슨 사건이 생겼으니까 그게 나쁘다 하고 댓글 쓰세요 하면, 나쁘다 나쁘다 하고 댓글 써요.
남한 사람들한테 배울 점
남한 사람들은 위에서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데모에 참가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세상이 바뀌죠. 북한 사람들은 입 딱 다물고 끼어들기 싫어해요. 나중에 보복 당할까봐. 그게 북한 사람들의 국민성이죠. 4.19봉기나 6.3민중항쟁, 5.18항쟁처럼 우리가 정말 목숨을 건다는 그런 각오가 돼 있으면 왜 세상을 못 바꾸겠냐는 겁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런 흐름을 만들어왔지만 북한은 못 만들었어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희생정신'이 없었던 겁니다. 제주도 4.3학살 때 군대가 5만명을 쏴죽였는데도 저항하는 거봐요. 대단한 거지.
탈북자 차별에 대해서
남한 사회에는 탈북자가 아니더라도 이미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공부 잘하는 애와 못 하는 애, 잘 사는 애와 못 사는 애, 아파트에 사는 애와 임대 주택에 사는 애... 이런 사실들을 외면하고 마치 탈북자들을 차별하고 외국에서 오는 근로자들이나 이민자들을 차별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남한의 학교와 교실에 이미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이 한 민족이라는 접근이 아니라 하나가 아니라는 데서 출발했으면 좋겠다. 2-30년만 떨어져 있어도 굉장히 다르잖아요. 근데 우리가 남한과 북한 60년 이상 떨어져 철저하게 다른 이데올로기와 문화 속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며 서로 분노와 증오를 키워왔잖아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우리가 하나다'라며 한반도기 흔들고 공이나 찬다고 하나가 되겠는가? 굉장히 낭만적인 생각이다. 일단 그런 생각을 좀 벗어놓고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다문화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베트남 사람들이나 몽골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한국말이 좀 서툴더라도 이해해 주고 귀엽게 봐주면서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왠 말투가 그래" 하고 차별하는 것 자체가 너무 이중적이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하나'라는 시나리오를 잠시 내려놓는다면 비로소 상대방이 좀더 잘 보이지 않겠는가. 결코 쉬운 얘기는 아니지만 거기서부터 출발해야만 탈북자 또는 향후에 만나게 될 북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나마 좀더 건강하게 설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햇볕정책! 남한의 원조물자가 가정까지 닿는가? 그저 정권 연장시켜 주는 건 아닌가?
삼백공업이라고 있죠? CJ 같은. 당시 미국의 원조물자가 대기업으로 들어갔어요. 그것이 우리 나라 부의 기초가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그처럼 북한에 원조물자가 들어가면 분명히 군부에 들어가고 당 간부들이 챙기고 힘 있는 사람들이 가져가겠죠. 그러나 군부가 다 먹나요? 못 먹어요. 다 소화를 못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 밑으로 내려가요. 그래서 우리가 돈을 주고 사먹죠. 돈을 적게 주고. 우리한테 직접 공짜로 들어오진 않지만 쌀이나 비료가 들어옴으로써 우리가 혜택을 받는 것만은 틀림없어요.
※삼백공업(三百工業): 미국 원조물자인 밀가루, 설탕, 면화 등에 의존한 1950년대 대표적인 소비재 공업. 삼성을 기반을 이룬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럭키, 삼호, 대한, 동양, 쌍용 등.
사람들이 의문을 갖게 됐어요. 남한에서 보내온 쌀을 보면 쌀알도 크고 종자도 좋고.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이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죠. 의약품 같은 것은 쓸 사람이 정해져 있어요. 아픈 사람이 쓰지 않겠어요. 비료 같은 것은 군부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식물을 자라게 하는 데 쓰이겠죠. 제초제는 정말 필요하거든요.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한 거죠. 이런 것들만 해결되면 아마 스스로 바꿀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