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최초 전차전】다부동 전투와 마이켈리스 전차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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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전차분대 마이켈리스 연대장, 주한미사령관 역임

당시 낙동강 전선 전체 상황을 보면 제일 먼저 8월13일~14일에 걸쳐 왜관, 현풍 지역에서 낙동강을 건넜던 북한 제3사단과 제10사단의 주력부대가 미군 제1기 기병사단에게 궤멸당해 강을 건너 패주했다. 김일성이 가장 믿었던 북한 제6사단은 마산 서부 산악지역에서 미군 킨 특수임무부대와 격전을 벌이며 병력을 소진했고, 8월14일 이후 국지전으로 전환됐다.

기세 좋게 낙동강 돌출부를 건너 창녕 명산의 고지를 선점했던 북한 제4사단은 8월18일 미군 제24사단과 미군 제1해병 여단에게 궤멸돼 강을 건너 패주했다. 낙동강 대안의 가장 큰 도시였던 안동을 점령하여 김일성에게 '안동사단'이란 칭호를 받았던 북한 제12사단은 8월9일 경상북도 남쪽에 있는 기계를 전격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국군의 발빠른 반격과 역공에 의해 8월17일 사실상 섬멸돼 산악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동해안으로 진군한 북한 제5사단은 국군 제3사단을 포위, 섬멸 직전까지 갔으나 워커 장군의 해상구출작전으르 실패하고, 포항 북쪽에서 저지당해 북한 제12사단과 산악으로 숨었다. 의성 방면으로 침투한 북한 제8사단은 김종오 장군의 국군 제6사단을 만나 고전 중에 한 발씩 한 발씩 진격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낙동강 서쪽에선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북한군은 낙동강 북쪽 한 곳에 화력을 집중하여 이 난관을 돌파하고자 했다. 험준한 산악 지역에서 힘겹게 싸우는 동쪽 지역에 비해 다부동 전선은 돌파하기만 하면 대구를 바로 점령할 수 있는 전략적 요층지였다. 북한군은 제1사단과 제13사단, 제15사단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다부동 전선에 투입하기로 한다. 8월 공세 최후의 카드였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북한군 3~4개 사단의 화력이 우세했고 국군 제1사단은 열세였다. 제1사단은 매일 평균 600~700명의 병력 손실이 발생해 후방에서 신병과 학도병을 보충받았다. 북한군도 마찬가지였다.

8윌16일 미국 극동군 폭격사령부는 북한군 대부대가 밀집돼 있다는 정보에 따라 왜관 약목의 낙동강변 일대에 융단폭격을 감행했다. 폭격기 98대를 동원하여 무려 960톤의 포탄을 투하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의 주력부대는 이미 강물 건너 전선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북한군은 어머어마한 미군의 폭격에도 아랑곳 없이 다음날부터 더 집요하게 공격해왔다.

벡선엽 사단장은 위기감을 느끼고 미8군 사령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워커 사령관 역시 다부동 전투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던 터라, 창녕에 있던 미군 제25사단 제27연대를 불렀다. 8월17일, 미군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 전차부대를 이끌고 다부동에 나타났다.

미군 제27연대는 화력 면에서 거의 사단 규모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이켈리스 연대장은 2차대전 때 유럽전선에서 활약했던 현대전의 베테랑이었다. 한국 전선에 참가하여 상주에서 마산, 마산에서 창령, 창녕에서 다부동 등으로 쉴 새 없이 이동하며 전장을 누볐다. 마이켈리스는 다부동에 도착하지마자 지형을 정찰한 후 천평계곡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적이 전차를 선두로 하여 공격해온다면 막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자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먼저 천평계곡을 동서로 나눈 뒤 왼쪽 최전방에 1대대 C중대, 후방능선에 1대대 A중대를 배치, 오른쪽 전방에 2대대 E중대, 후방능선에 G중대를 배치하고 E중대 오른편 능선에 F중대를 배치했다. 가운데 한천을 따라 전차 4대를 배치하고 그 남쪽으로 1대대 B중대를 배치했다. 전차 4대는 후방에 배치한 후, 그 뒤에 예비로 1개 대대를 두었다. 그리고 능선 뒤쪽에 포병을 배치했다.

전방부대 앞으로 지뢰를 매설했다. 직접 현장을 왔다갔다하며 대대장과 전차 중대장에게 거듭 지시하고 확인했다. 각 부대의 방어선을 명확하게 그었고 각 장교에게 임무와 위치를 거듭 확인한 뒤에야 진지로 들어왔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뢰와 전선 병력, 전차와 포병, 공중 지원까지 입체적 작전지도가 다 들어있는것 같았다.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은 혀를 내둘렀다.

8월18일, 북한군은 일주일 동안 3개 사단을 총동원한 치열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다부동을 돌파하지 못하게 되자 작전을 바꾼다. 북한 제15사단을 동쪽의 영천 방면으로 돌리고, 유학산 일대는 북한 제13사단에게 인계한다.

8월21일 밤 천평계곡, 북한 제13사단은 보유한 모든 탱크를 동원해 미군 제27연대의 전차부대와 정면대결을 벌이기로 한다. 북한 제13사단측에서 보면, 마지막 혈전을 각오한 것이었다. 칠혹 같이 어두운 밤, 좁은 계곡에서 한국전쟁 최초의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계곡을 울리는 포성과 포탄의 불꽃, 병사의 함성과 비명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포탄이 섬광을 그으며 일직선으로 날아 맞은면 계곡 암벽에 부딪쳤다. 돌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한 미군 병사는 다음날 "마치 볼링장 같았다"고 술회했다

미군도 제법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 제13사단 전차부대는 이 전투에서 궤멸되고 만다. 팽팽했던 다부동 전투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전투가 길어지자 북한군의 전력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8월 22일,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1대대가 마침내 유학산을 탈취했다. 북한 제13사단의 패잔병들은 산을 내려가 북쪽으로 도주했다. 국군 제12연대 3대대는 683고지에서 무려 8번이나 점령과 후퇴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북한군을 몰아냈다. 328고지를 집요하게 공격하던 북한군 역시 북쪽으로 물러갔다.

'다부동 전투'는 '지평리 전투'와 함께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된 '2대전투'라 일컬어진다. '다부동전투'는 낙동강 전투 중 하나이고, '지평리전투'는 중공군과 밀고 밀리는 유엔군 전투 중 하나이다. 낙동강 전투라 하더라고 더 급박하고 치열한 전투도 많았는데, 왜 하필 '다부동전투'를 가장 중요한 전투라 일컬을까?

예를 들면 마산 전투만 하더라도, 만약 마산이 뚫렸을 경우 바로 부산이 점령되기 때문에 그보다 더 중요한 전투는 없었다. 현풍 전투만 하더라도 미군이 초기에 섬멸시키지 않았으면 대구가 점령당할 뻔했다. 9월 공세의 영천 전투 같은 경우는 유엔군 사령부가 한반도 철수를 거론할만큼 심각했다. 그런데도 왜 유독 '다부동전투'일까?

그 이유는 '타이밍'에 있다. 북한군이 총력을 기울인 5개 공격 집단 중 4개 공격 집단은 8월15일〜17일 기점으로 별 성과 없이 전투력을 거의 소진해버렸다. 김일성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건 전선은 다부동이었다.

북측에서 볼 때 국군 제1사단을 격파하면 대구의 미8군은 부산으로 후퇴할 것이고, 대구를 점령하면 전투인원과 물자를 다시 비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약체라 여겨졌던 국군 제1사단이 의외로 8월13일 다부동에 방어선을 펼친 이래 8월말까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버틴 것이다. 북한군의 8월 공세 마지막 공격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다부동 전투틀 마지막으로 북한군의 8월 공세는 끝났다. 소규모의 국지전은 계속 있었지만 전세에 영향을 미치는 전투는 아니었다.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려던 김일성의 계획은 초반에 무산되고, 2차 목표였던 대구 점령은 요원하기만 했다. 북한군 전 병력은 결정적 피해를 입었고 다시 회복하기엔 무리가 많았으니, 김일성은 병력과 장비를 보충하여 9월 공세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