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김홍일 장군이 없었다면 조국은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초기 서울 함락 직후의 상황은 국군 1, 2, 5, 7, 수도사단이 와해되어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으니 김홍일 소장이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취임했던 것이다. 김홍일 장군은 남북한 통틀어 유일하게 사단급 군대를 운영한 실전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다. 중일전쟁 당시 장개석 국민혁명군 사단장을 맡아 일본군과 전투하여 승전하기도 했다.
김홍일 장군은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으로 오산학교에서 이승훈, 조만식 선생 문하에서 수학했고, 이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했다. 김구 주석의 요청으로 한국 광복군 사령부 참모장(소장)에 취임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귀국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임관되어 국군 역사상 최초로 장군이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군 원로회의에 참가하여 한강 방어를 제안했으나 채병덕 참모총장의 거부로 한강 방어선 구축이 지연된다. 김홍일 장군은 한강선 결전을 강하게 주장했고 이에 이범석, 지청천, 김석원 등 숙장들도 적극 동조했으나, 일본군 병기장교 출신으로 실전 경험이 전무했던 채병덕은 "늙은이가 자꾸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고 우긴다"며 "매번 지기만 한 장개석 군 장군이 무슨 장군이냐"고 비하했다.
이후 김홍일 소장은 개성을 관할로 하는 1사단(사단장 백선엽)의 작전지도를 맡게 된다. 얼마 뒤 인민군 전차가 창경원에 침입하였다는 전보를 들은 김홍일 장군은 곧바로 백선엽 대령에게 공격작전을 취소하고 도강하라고 지도했다. 하지만 백선엽 대령은 육본의 명령이 사수였기에 어쩔 수 없다는 답을 한다. 당시 김홍일 장군은 정말 답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백선엽 대령이 말을 듣지 않자 김홍일 장군은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찾아가 철수를 건의했지만, 채병덕은 계속해서 수도사수!! 북진통일!! 나가자!! 이러고 있었으니... 결국 한강 이북에 있던 5개 사단 병력이 철수하기도 전에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자 5개 사단은 북한군 공세에 버티지 못해 대부분 뿔뿔히 흩어지고 만다. 백선엽은 부대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후퇴해서 한강 이남에서 다시 살아 만나자"고 말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김홍일 장군이 서부전선의 모든 부대를 지휘하는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무질서하게 철수하는 병력을 집결시켜 부대를 재편성하고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 사령부였지 휘하 병력은 커녕 참모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1인 사령부였으나 병력을 수습하여 3개 사단을 구축해낸다.
김홍일 장군 부임 이후 국군의 전투력은 급격히 상승된다. 그는 맥아더를 직접 만나 한강선 방어계획을 제대로 설명했고 부족한 탄약과 무기의 공급, 그리고 미 공군에 의한 한강철교의 파괴를 요구했다. 그리고 지연전을 펼쳐 미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7일이나 버티는 기적을 보였다.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도 김홍일 장군 부임 이후 한국군 포병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견실한 사격 통제, 사격의 정확도 등이 돋보였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전군은 총 8개 사단이었는데 그 중 5개 사단이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이렇게 무너진 병력을 수습하여 다시 전투능력을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했다. 이때 명태사건으로 1사단장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김석원 장군이 김홍일 장군을 찾아와 도와줄 일이 없겠냐며 찾아온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곧 재편된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진천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만약 이렇게 조직화되지 않았더라면 이후의 지연작전이나 낙동강 전선도 유지할 병력 자체가 없어서 무너졌을 것이다. 백선엽 대령은 한강 도하 이후 병력을 찾을 수 없어서 소문을 듣고 시흥에 가보니 1사단 병력들이 남아 있어 재회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만약 김홍일 장군이 없었다면 1사단은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괜히 백선엽 대령이 "이 분(김홍일)이 없었다면 조국은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다"라고 고백한 것이 아니었다. 이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1군단으로 재편되어 지연작전의 중축으로 활동했다. 당시 국군에서 지연작전 경험이 있는 사람은 김홍일 장군이 유일했는데, 중화민국의 국민혁명군에서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실제로 군단급 부대를 운영하며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지연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김홍일 장군은 개전 당시 채병덕의 전략적 과오로 인한 군사적 위기를 대부분 수습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수도사단, 1사단, 2사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미군과 협조하여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 대성공시켜 무려 7일이나 되는 시간을 벌었다. 이러한 성공이 아니었다면 인천상륙작전 등 반격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안강-기계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