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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일본의 새 연호로 발표된 '레이와(令和)'의 출처가 만엽집(万葉集) 제5권에 실린 '매화의 연회'의 서문에 기록된 '初春[令]月、氣淑風[和]、梅披鏡前之粉、蘭薰珮後之香'라는 노래에서 인용된 것이 밝혀짐에 따라 연일 화제를 부르고 있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봄 소식을 전한다
일본 나라(奈良)시대(710~794)의 초반, 오늘날 후쿠오카켄 다자이후(福岡県太宰府)에서는 시인으로서 이름을 떨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지쿠시가단(筑紫歌壇)을 형성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은 바로 '다자이후'의 장관을 지낸 오토모노 다비토(大伴旅人)와 지구젠국(筑前の国, 후쿠오카켄)의 장관 야마우에노 오쿠라(山上憶良)였다.
'매화의 연회'는 730년 정월 13일 다비토 장관의 저택에서 열렸다. 당시 연회를 주최한 사람은 다비토였으나 '매화의 노래'의 서문을 작성한 것은 그의 절친이었던 오쿠라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봄 영월(令月, 음력 2월)에 공기는 맑고 바람은 평온하네. 매화는 미녀의 거울 앞에 날리는 분가루처럼 하얗게 피고, 난초는 몸에 뿌린 향기와 같은 냄새를 풍기네."
오토모 씨족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조상인 아마노오시히노미코토(天忍日命)는 규슈 가고시마켄과 미야자키켄의 경계에 있는 다카치호(高千穂) 봉우리에 강림한 천손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를 맞이한 가문으로서, 이후 천황의 근위병으로 활약했다. 또한 야마토다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의 동정(東征, 동쪽정벌) 때에도 오토모노 다케히(大伴武日)가 최측근으로 종군한 씨족이기도 하다.
만엽 시인·야마우에노 오쿠라는 백제 도래인의 후예
한편, 오쿠라는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660년에 태어났으나, 663년 백제가 백강(금강 또는 동진강 하구) 전투에서 패하자 4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망명하여, 비와코(琵琶湖)의 후미진 곳에 위치한 시가현 고가군 미나구치쵸(滋賀県甲賀郡水口町)에 자리잡았다.
그 후 백제의 어의(御醫)였던 오쿠라의 아버지 야마우에노 오쿠닌(山上憶仁)은 덴지(天智)천황의 주치의가 되었고, 오쿠라는 후일 견당사로 당나라에 파견되어 최신 학문을 습득했다. 당시 견당사로 선정된 인물들은 오쿠라, 사이초(最澄) 등과 같이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갖춘 한반도계 도래인 지식층이었다.
귀국 후 오쿠라는 호키(돗토리켄)의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쇼무(聖武) 천황의 교육을 담당했다. 지쿠젠국(후쿠오카현)의 장관으로 발탁된 후로는 오토모노 다비토(大伴旅人) 등과 함께 지쿠시가단(筑紫歌壇)을 형성했다.
만엽집의 정신『和』
만엽집 연구의 일인자로 알려진 나카니시 스스무(中西進) 오사카여자대학 명예교수는 "본래 만엽집의 노래를 촉발시킨 원동력은 고대 조선으로부터 받은 충격이었다. 만일 백촌강 전투가 없었다면 만엽집도 없었을지 모른다. 백제 왕조가 멸망함에 따라 백제의 고관들이 왜국으로 망명한 결과, 백제의 문화를 왜국이 계승하는 형식으로 역사가 흘러갔다. 그런 와중에서 탄생한 것이 만엽집"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만엽집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아스카 시대(538〜710년)의 헌법17조(성덕태자가 제정했다는 일본 최초의 성문법)의 이화위귀(以和爲貴, 화합을 귀하게 여김) 정신이 나라 시대의 쇼무(聖武) 천황에 의해 만엽집으로 되살아났다.
이후 정적 후지와라 도키히라(藤原時平)의 계략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다자이후(太宰府)로 좌천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의 유지를 계승한 기노 쓰라유키(紀貫之)의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서 "힘을 들이지 않아도 천지를 움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도 감동시키고, 남녀 사이를 부드럽게 하고, 용맹한 무사의 마음을 달랜다"는 정신으로 공식화되었다. 이것이 다시 제2차 세계대전 후 헌법 9조로 재현되었다."
결론적으로 나카니시 씨는 "화합(和)의 의미가 오늘날 일본 헌법의 근원인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쁜 일이 아닌가. 이 결론은 일본인인 나 자신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일이며, 이제 당당히 가슴을 펴고 살아갈 수 있게 됐다"라고 역설한다.
『令和』고안자는 나카니시 씨였나
새 연호 선정을 놓고 일본 정부가 고안자로 위촉한 사람은 나카니시 명예교수, 이시카와 다다히사(石川忠久) 전 니쇼가쿠샤(二松学舎) 대학장, 이케다 온(池田温) 도쿄대 명예교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에는 일본의 고전을 출처로 하는 3안과 중국 고전을 출처로 하는 3안으로 좁혀진 가운데, 최종적으로『令和』가 "가장 인기를 끌었다" "긍정적인 의견이 많았다"라고 한다.
새 연호가 공표되자 아베 총리는 "만엽집은 일왕, 왕족, 귀족뿐 아니라 농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읊었던 노래가 담겨 있다"며 "일본의 풍요로운 국민문화와 오랜 전통을 상징하는 국서"라고 설명했다.
연호에 내포된 의미에 대해서는 "유구한 역사와 향기로운 문화, 사계절의 아름다운 자연, 이러한 일본의 국민성이 면면히 다음 세대에 이어지게 한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봄 소식을 전하며 멋지게 피어나는 매화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일의 희망과 더불어 각자의 꽃을 크게 피울 수 있는 일본이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令和』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 장관은『令和』의 고안자 대해 "고안자 본인이 익명으로 해달라고 희망했다. 고안자를 밝히면 새 연호과 특정 개인의 관계가 강조될 수 있다"라며 밝히지 않을 의향을 내비췄다.
일본 정부는 이번에 채용되지 않은 다른 안들과『令和』를 포함한 고안자들의 이름을 원칙적으로 30년간 공개하지 않고, 후일 선정 작업을 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유식자 간담회의 논의 내용과 일련의 경과를 기록하여 공문서로 남길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