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대 예술단의 무용수였던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의 본명은 고영자였고 그의 아버지 고경택은 오사카의 나리타 군수공장에서 조선인 징용자들을 관리하던 친일파였다. 만일 친일파 후손인 재일교포 고영희와 김정일이 동거한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날이면 그 즉시 김정일은 후계자의 지위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할 때까지 고영희의 존재를 철저히 감췄다.
김정은이 태어난 1984년은 오랜 우상화 선전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은 절세의 위인이 돼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김정은을 그대로 학교에 보낸다면 수령의 자식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김정일은 김정은을 형 김정철과 여동생 김여정과 함께 스위스 베른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그로부터 김정은은 청소년기 약 4년 반 동안(1996년 여름〜2001년 1월) 스위스에서 프랑스·일본 등을 돌아보며 선진자본주의 시스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북한을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꿈을 품게 된다. 김정은의 롤 모델인 중국 덩샤오핑도 프랑스 유학을 통해 자본주의를 직접 경험한 뒤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한 바 있다.
스위스에 간 지 2년 뒤인 1998년 김정은은 "외국 백화점과 상점에는 물자와 식량이 넘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어찌 된 일인가"라고 의문을 품었다. 또 "우리나라 공업기술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비해 한참 뒤떨어졌다. 자주 정전이 되고 전력 부족도 심각하다. 중국은 인구가 13억인데 통제가 가능하다. 전력보급을 어떻게 하는가?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려면 농업도 큰 문제다"라며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오늘날 김정은은 '현대적인 북한' '현대적인 지도자'의 이미지를 어필하기 위해 무척 애쓰고 있는 모습니다. 세련된 아내 리설주와 공개석상에 나타나기도 하고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포옹하며 나이에 상관없이 편하게 대해 주기도 한다. 현대적인 시설들을 공개하며 낙후되고 굶주린 과거의 모습을 지우려 한다. 북한 주민들이 남한의 풍요로움을 알게 되면서부터 북한에도 물질적 풍요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고심하는 모습이다.
중국의 북한 전문가들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위해 방중한 김정은이 빠듯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의 실리콘'이라고 불리는 중관촌(中關村)을 찾은 것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왕샤오커 지린대 동북아연구원 교수는 "김정은이 중관촌을 방문한 것은 핵 개발에서 경제건설로 방향전환한 것"이라며 "김정은의 방중수행단에 군 인사가 없었던 것도 김정은이 선군정치를 폐기하고 경제건설에 중점을 두기 시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진창이 옌볜대 교수도 "김정은은 부친 김정일과 달리 비교적 민생 의식이 강하고 일정한 개혁 의지도 갖고 있다"면서 "핵 보유만으로 북한의 경제난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핵 포기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전망했다.
이렇게 볼 때 김정은은 자멸적이지 않으며 상당히 이성적인 인물로 보인다. 그는 북한의 군사능력이 상당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나 북한이 한국이나 미국과의 장기적인 분쟁에서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은 공격적이기는 하나 무모한 '미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나 대화를 통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해왔다. 핵무기를 포기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예로 이라크와 리비아를 자주 언급하기도 했다. 한 때 '아프리카의 왕'으로서 리비아를 40년 동안 통치했던 카다피는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벌거벗은 채로 폭행당한 뒤 시체는 냉동고에 저장되었다. 그 처참한 모습은 지금도 김정은의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정은이 미국에 맞서 핵을 붙들고 있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의 핵프로그램의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며 무력분쟁을 야기시키는 궁지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아직은 그의 야심을 억제시키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자기 형과 고모부마저 살해한 김정은이 하루 아침에 개과천선하여 평화의 지도자로 거듭나 오로지 인민의 복지를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1980년대 레이건 전 대통령이 냉전을 끝내고 미국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리라고는 그 당시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건은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고르바초프에게 '베를린 장벽을 허물라'고 촉구했고 결국 소련 붕괴와 평화 정착으로 이어졌다. 레이건은 미국 경제를 부흥시킴과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해 강력한 경제와 군사력으로 소련을 압박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소련에 우호적인 메시지를 보내며 의사 소통을 위한 협상을 추진했다.
오늘날 북한을 대하는 트럼프의 전략은 레이건 대통령과 상당히 닮은 점이 많다. 그는 한편으로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위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대한 평화협상으로 핵 위기를 해소하려 한다. 북한의 경제와 민생 개선, 그리고 '평화와 안전,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협조할 것이며 2300만 북한 주민을 새로운 미래로 이끌겠다는 약속도 했다.
북한이 정말로 중국을 멀리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포기한다면, 그리고 미국의 협조 하에 핵을 포기하고 체제를 개혁하여 민생경제를 살린다면, 또 한번 '평화적 전환, 공산 해체'라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국민, 군대, 국가 경제는 정권 교체 과정에서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는 금후 개혁·개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들 것이다. 노멘클라투라는 20만〜25만 명에 달하는 '공산 귀족'을 말한다. 고르바초프의 야심찬 개혁·개방 정책이 실패하고 소련이 붕괴된 것도 노멘클라투라의 저항과 반발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과연 고르바초프처럼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북한 인민을 위해 냉전 종식을 선언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김정은이 고르바초프와 같은 생각을 갖고 오는 2월에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에 임한다면 북한의 비핵화는 쉽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CVID' 대신 'CVFD'를 검토해 볼 필요도 있다. 'F'는 '빠른(fast)'을 의미한다. 트럼프가 가장 원하는 것이 '빠른 비핵화'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오는 10월 노벨평화상 수상자 결정 이전에 비핵화와 관련된 획기적인 합의와 조치를 원하고 있고, 2020년 재선 도전 이전까지 비핵화 완료를 희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빠른 비핵화'와 그에 따른 빠른 대북 안전보장과 대북 제재 완화와 해제 등 '빠른 상응 조치'가 단계적 또는 동시에 이뤄진다면, 김정은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옛 소련보다 경제체제가 더 망가진 북한이 끝없이 대결노선을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 자멸을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김정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과 북한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반역사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김정은은 아직 배우는 중이며 우리는 그가 올바른 것들을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북한의 불안한 현재와 장래에 대해 밤새워 열정적으로 토로하며 북한이 왜 그렇게 낙후돼 있는지 절절히 고민했다. 비핵화와 함께 대북제재가 해제되면 그는 그토록 갈망했던 개혁·개방의 길로 거침없이 전진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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