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의 뿌리】천자(天子)라는 호칭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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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는 멀리는 1만5000~1만2000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북쪽 아이누족으로부터, 73대(약 2100년)에 걸쳐 일본 본토를 통치한 우가야(야마타이코쿠=邪馬台国)를 거쳐, 규슈로 건너간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세운 야마토왕국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 후 선진문화를 갖고 이주한 고구려·백제·신라인들이 일본을 장악하고,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자 '왜'를 '일본'으로(670년), '왜왕제'를 '천황제'(674년)로 고쳐 불렀다. 천황은 김수로왕의 후손 김해김씨가 차지하고, 황후는 백제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국가 기미가요(君が代)의 본 뜻은 '김(기미)씨의 시대'라는 뜻이다.

한편 일본은 천황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운 나머지 1915년 6월 29일 조선총독부 경무령을 포고하여 치안상의 이유로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의 족보발행을 금지시켰다. 285개나 되는 김씨 본관 중 하나에 불과한 김해김씨의 족보가 왜 '일본의 국가안전과 사회공공의 질서를 해친다'는 것일까? 그 열쇠가 김해김씨의 족보에 있다.

1864년에 발행된 김해김씨의 족보에는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에게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부터 열째까지의 일곱 아들은 세상이 되어가는 꼴을 비관하여 구름을 타고 나라를 떠났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일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일본이라 불리는 나라를 건국한 황실의 시조는 하늘 나라에서 구름을 타고 규슈에 있는 다카치호(高千穗)의 '구지후루'에 내려왔다"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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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역사 교과서에서 "천손인 천황이 BC660년 2월10일 규슈 다카치호(高千穗)에 강림했다"고 가르치고 이 날을 건국기념일로 정했다. 그리고 "다카치호 정상에서 내려오는 천손을 모두 엎드려 맞이했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천황이 외부에서 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다카치호의 '구지후루(1574m)'는 바로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구지부리(龜旨峰)가 소리변화된 것이다. 그리고 다카치호 옆 '가라쿠니다께(韓國岳·1700m)'의 자락에 있었던 에미노구마(笑熊), 도미노구마(富熊), 시시노구마(獅子熊), 호시노구마(星熊), 히라구마(平熊), 고이노구마(戀熊), 구마사키(熊崎) 등 '일곱 곰의 마을'은 바로 '일곱 명의 금(김)씨가 살던 마을'로 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살던 곳이다.

PicsArt_12-08-08.32.41.jpg'일곱 곰의 마을' 중 하나인 '시시노쿠마'의 위치를 알리는 표석(霧島市)
가고시마켄(鹿児島県) 시가쿠칸(志學館) 대학의 후지나미 미치히로(藤浪三千尋) 명예교수의 말에 의하면 '일곱 곰의 마을'은 "하나의 마을이 아니라 가고시마켄 고쿠후시(國分市=現·霧島市)에 산재해 있던 일곱 고을인데,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 2001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현 아키히토 천황은 우익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1300년 전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놓고 볼 때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느낀다"며 천왕의 모계 혈통이 백제계라는 사실을 직접 언급했다. 그런데 아사히신문을 제외한 다른 언론들은 보도하지 않았다.


아키히토 천황은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강조하고 한국에 친근감을 나타낸 적극적인 친한파이자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천황의 한국 혼혈에 대해서 얘기한 후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불행한 시기에 귀국민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며 저는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또 2005년 사이판 방문 때는 한국인 위령탑을 찾았고, 패전 70주년인 2015년에는 "만주사변에서 시작된 이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 향후 일본의 모습을 전망하는 것이 지금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작년 9월에는 천황 부부가 고구려 왕족을 모시고 있는 고마(高麗)신사를 찾아 정식으로 참배했다. 내년 4월 퇴위를 앞두고 한반도를 상징하는 고마신사를 방문하여 반성과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날 일본은 한민족의 정기가 되살아나 한일합방의 정통성이 사라질 것을 우려해 경찰, 관리들을 동원하여 학교, 사찰, 서원, 서당, 종가 등 방방곡곡을 뒤져 20여만 권의 서적을 압수해 대부분 불살랐다. 환웅천황, 치우천황 등 환단시대 천황의 역사와 박혁거세 아들의 일본문화 개창, 광개토대왕의 일본 본토 정벌, 백제가 야마토 '왜'를 속국으로 삼은 역사 등 한민족이 일본 천황 역사의 뼈대를 구성한 사실들이 밝혀질까봐 일본 궁내청은 고분에 대한 학술조사를 거부해왔다.

고려의 국력이 약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역사에 등장했던 최고 통치자들은 천제(天帝), 천자(天子), 천황(天皇), 천왕(天王), 황제(皇帝), 성제(聖帝), 태황(太皇) 등 왕보다 더 존엄한 칭호를 썼다. 후한 말기의 학자 채옹(蔡邕)이 "천자라는 호칭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한 대로 대륙의 주인이었던 동이 조선은 이웃나라의 섬김을 받는 '천자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와 같은 칭호를 주변국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던 것일까? 일본에서는 지금도 천황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우리는 민족적인 주체성도 확립하지 못한 채 우리 민족의 개국시조를 천황이나 황제는커녕 일개 군장격인 단군(檀君)이라 부르며 스스로 격을 낮추고 있다. 왕이나 군의 호칭을 가진 통치자는 황제나 천황의 호칭을 가진 통치자의 신하일 뿐이다.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 걸맞은 뜻과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각자 이름과 함께 직함이나 칭호가 있기 마련이며, 칭호는 당사자의 지위나 품격이나 상징적인 면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천자사상'에 걸맞은 칭호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이 조선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일본은 천황의 시조인 진무 천황이 바로 김수로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마땅하다. 이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자 조상과 후손에게 예의와 도리를 다하는 길이다. 그동안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생명의 위험마저 무릅쓰고 도전해오신 아키히토 천황께 감사드리며 한국과 일본의 역사 청산 문제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시길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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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도 천황 탄신 기념행사, 서울 남산(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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