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맑으나 파고는 높다】산케이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서울특파원이 쓴 한일 현대사 "친일≠절대악, 반일≠절대선"

PicsArt_12-07-07.24.54.jpg
산케이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서울특파원
日本語
'날씨는 맑으나 파고는 높다'는 한국에서 36년을 생활한 산케이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黒田 勝弘) 특파원의 논설집 겸 수필집이다.

저자는 '한일의 역사' 혹은 '한일 상호이해'를 말하려면 반드시 일본인의 시각이 있어야 한다며 "일본의 발바취를 찾으려면 한국인의 견해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견해가 필수이며, 그것을 합침으로써 비로소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고 강조한다.

그가 오래 근무했던 산케이신문은 국내에서 극우파의 이미지가 강해 구로다 기자도 흔히 '우익'으로 많이 인식되곤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싫어하는 나라(외국을 포함해)에서 그렇게 오래 살 수는 없다. 스스로도 한국에 너무 오래 살아서 한국을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이 책은 전체 15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테마는 헤이그 밀사사건, 러일전쟁 개시, 독도 문제, 민비 암살 사건, 히로시마와 한국인, 이방자 왕세자비, 총독부 청사 철거, 한운사(韓雲史) 씨와 가지야마 토시유키(梶山季之) 씨, 총독부와 국립박물관, 한국전쟁과 마츠모토 세이쵸(松本清張), 조국 귀환운동의 비극, 김희로(金嬉老) 사건, KAL기 사건과 김현희, 김일성과 박정희 등등이다.

먼저 거론되는 것은 이른바 헤이그 밀사사건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1905년 이른바 한일보호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이에 반발한 한국은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세 명의 밀사를 보내 한일보호조약의 무효, 불법을 호소했다. 이것이 헤이그 밀사사건이다.

화가 치민 일본 측은 고종을 강압적으로 퇴위시키고, 몸이 약하고 판단력이 떨어진다던 아들 순종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3년 뒤에 한국을 병합해버리고 만다. 결과적으로 '헤이그 밀사사건'은 고종을 위시한 한국 측의 기대와는 반대로 한일합병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러일전쟁의 본질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러일 간의 싸움이었다. 그로 인한 전쟁이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일본 함대가 인천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 코레즈호와 와리야크를 격침시켰다. 간신히 러시아를 격파한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게 되었고, 러일전쟁 후 '오늘 날씨는 맑으나 파도는 높고'라고 새겨진 도고 헤이아치로(東郷平八郎) 제독의 친필 비석이 거제도에 세워졌다.

독도는 러일전쟁과 관계가 깊다. 독도가 일본령(시마네현)으로 편입된 것은 1905년 2월이다. 바로 러일전쟁 와중이었다. 동해 해전은 5월 하순이었다. 일본 측은 1910년 한국병합보다 독도의 일본령 편입이 먼저라며 독도의 영유권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하고, 한국 측은 독도는 예로부터 한국의 영토이며 한국이 보호국으로 편입된 뒤 일본에게 빼앗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불가사의한 것은 한국이 독도에 여러 인공시설을 지어 연간 20만명 이상의 인간을 들여보내 섬을 '만신창이'로 만들면서도, 섬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천연기념물로 취급한다. 이래서야 강치도 섬에 다가가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한일 공동으로 독도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하면 좋지 않을까"라고 제언하기도 한다.

조선 왕족 출신으로 일본 육군 중령이 되어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해 사망한 이우(李鍝) 전하의 시신은 경성(현 서울)으로 옮겨져, 8월 15일 1시간 동안 옥음방송(일왕의 육성방송)과 함께 육군장이 치러졌다. 또 일본 황족 출신으로 '한일융화책'에 따라 정략결혼하여 이씨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된 이방자(李方子) 여사는 전후 한국에 남아 복지사업에 반생을 바쳤다. 그 장례행렬은 1km에 달했고, 한국인은 이마를 바닥에 대고 '우리 왕비'라며 절을 했다.

이방자 여사에게 "한일 간의 가혹한 역사를 짊어지시고, 일본인으로서 이토록 애를 쓰셔서 너무 고마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는 "망국의 한을 넘어 이국(異國)의 왕비를 이토록 따뜻하게 전송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마지막 15장에서 저자는 '김일성을 이긴' '박정희의 대한민국'을 이야기한다. 일본은 해방후 한반도의 남과 북에 박정희와 김일성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그런데 박정희는 일본을 받아들여 활용함으로써 나라 만들기에 성공했다. 그에 비해 김일성은 일본을 거부함으로써 실패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과 북한의 격차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은 과거의 (일본이라는) 유산을 살리고, 거기에다 새로운 일본을 더함으로써 성공했다. 그런데 김일성의 북한은 과거의 일본을 완전히 부정하고 버렸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항일의 과거'에만 집착하고 안주하며 나아가 새로운 일본도 계속 거부한 탓으로 국가경영에 실패하고 국민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해방 후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의 남북한 발전의 격차에는 이 '일본'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PicsArt_12-07-08.21.43.jpg
재한일본인회 라일락 맴버와 함께, 산케이신문 서울지국(12/5)

この記事への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