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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39년 대부여(大夫餘) 제4대 고열가 단군황제 때, 나이 23세의 해모수(解慕漱)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북부여를 일으켰다.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 난변(蘭邊)에 궁실을 쌓고 고구려(高九黎)를 건국한 후, 이듬해 수유후(須臾侯) 기비(箕丕)와 함께 왕검조선의 수도 백악산(白岳山)을 고립시키자, 왕검조선의 고열가황제는 더 견딜 수 없어 5가(五可)에게 나라를 맡기고 아사달산으로 입산했다.
이후 5가가 함께 다스리는 공화정이 6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해모수가 기비를 번조선왕(番朝鮮王)으로 삼고 B.C 232년 5가를 설득하여 왕검조선의 진한(辰汗)이 관할하던 지역을 모두 장악하자,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하였다.
BC 221년, 해모수 단군황제에 의해 기비의 아들 기준(箕準)이 번조선(番朝鮮) 왕으로 즉위했다. BC 194년, 기준은 연(燕)나라에서 망명온 위만의 꼬임에 빠져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운장 지역을 맡겼다가, 세력을 확장한 위만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바다로 쫓겨 돌아오지 않았다. 위만조선이 북부여의 번조선(산동성)을 점령하자, 번조선의 남은 세력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남쪽에 월지국(月支國)을 세웠다.
BC 108년 제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황제 때, 한(漢)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위만조선을 평정하더니 쇠약해진 북부여로 침입했다. 이때 세상을 구할 뜻을 세운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졸본(卒本)에서 제후로 즉위한 뒤 북부여를 압박했다.
이에 제5대 해부루(解夫婁王) 단군황제가 항복하자, 고두막 왕(동명왕)은 북부여의 제6대 단군황제로 추대되었고, 해부루 황제는 왕으로 전락되어 가섭원부여(동부여)를 세우고 북부여의 제후국이 되었다.
한편 부여의 황손 고모수(高慕漱)의 아들로 태어난 고주몽(高朱蒙)이 제7대 고무서(高無胥) 단군황제의 무술시합에서 장원을 하자, 황제는 주몽을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여겨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여 고주몽은 황제의 유언에 따라 북부여의 대통을 이어받아 제8대 단군황제가 되었다.
고주몽은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고구려(高句麗)로 바꾸었다. 조선 단군왕검의 옛 전통을 되살리고 해모수에게 제사하여 고구려의 태조로 삼았으며 연호를 다물(多勿)이라고 했다. 해모수의 고향이 고구려였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광개토대왕이 고주몽의 12세손인데도 불구하고 1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광개토대왕이 해모수 단군황제의 17세손이기 때문이다.
고주몽 황제의 셋째 황비였던 소서노(召西弩)는 BC 42년 아들 비류 온조와 함께 산동반도 바다 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 후 BC 18년 비류와 온조는 막조선(莫朝鮮: 마한)의 미추홀(인천)에 도착하여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 하였다. 중원의 십제를 백제로 명칭을 바꾸어 대륙백제와 반도백제가 같이 존재하게 되었다.
한편 가섭원부여 왕실의 딸 파소(婆蘇)가 있었는데, 파소는 결혼 전에 잉태하여 의심을 받자 시녀들과 도망쳐 막조선의 내을촌(길림성?)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다. 막조선의 6부 촌장들은 아이의 숙성함과 성덕을 보고 박혁거세(赫居世居)라 이름 짓고, 거서간(居西干)으로 삼아 서라벌에 도읍을 정했다. 나라 이름을 사로(斯盧)라 하였는데, 사로는 신라의 첫 이름이다.
가락국(駕洛國)은 막조선의 남단이었던 지금의 경남과 경북 일대에 있었는데, 북부여 제국의 막조선 왕이었던 맹남의 통치세력이 약해지면서 가야 고을들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이다. AD 42년 제1대 김수로왕이 즉위한 뒤 490년간 존속했다.
(사)국사바로알기중앙회 상임이사 송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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