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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계 연구에 따르면 최초의 인류가 출현한 것은 600만년전이며, 환단고기에 기록된 최초의 인간 조상은 나반(남자)과 아만(여자)이었다. 나반과 아만은 만주의 송화강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살다가 꿈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고 자연스럽게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기록상 전해지는 인류 최초의 나라는 7만년 전에 세워진 환국(桓國)이며, 최초의 왕은 안파견(安巴堅) 환인천제(桓因天帝)였다. 환인천제는 천산(天山: 알카이산맥과 천산산맥 사이)에서 도를 통하여 훌륭한 무도(巫道)의 선생이 되었으며, 스스로 몸을 다스려 무병장수하였다고 한다.
환인천제는 파미르고원의 동북단 분지에 위치한 우루국(虞婁國: 필라국(畢那國)이라고도 함)을 도읍으로 삼고, 파내류산(波奈留山:파미르고원)에서 천해(天海:바이칼호)의 동쪽에 이르는 12개 나라를 다스렸다.
제6왕조 구을리(邱乙利) 환인천제 시대에는 성인들이 출현해 천경신고(天経神誥:천부경+삼일신고)를 가르쳐 백성들 사이에서 구전되기 시작했다. 수도 우루국의 생활이 부유해지자 각지로부터 유입되는 인구가 늘어나 제7왕조 지위리(智爲利) 환인천제 때 인구 분산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새 땅을 개척하여 나라를 세우려는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당시 행정부의 존경받는 환웅(桓雄)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환웅이 3년간 3,000무리를 모아 태백산(太白山: 중국 서안)으로 떠날 때, 지위리 환인천제는 백성들을 통솔하고 이웃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옥새인 천부인(天符印: 거울, 칼, 방울)을 환웅에게 하사하고 조서(詔書)를 내렸다.
"군이 수고스럽지만 수고를 아끼지 말고, 몸소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새 땅으로 가 나라를 세우고(開天),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스승의 도를 세우고(立教),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祭天), 아버지의 권위를 세우고(父権確立), 태백산에 도착하면 현지 상황과 백성들의 사정을 잘 살피어 그에 맞는 바른 이치과 경우로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하라(在世理化). 3000무리를 도와 잘 살게 하여(弘益人間) 자손만대에 모범(本)이 되도록 하라."
그 무렵 인도 북부에 있던 환국 12나라 중 수밀이(須密爾)국에서도 새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큰 뜻을 가진 무리들이 서쪽 나라로 떠났다. 이때 그들이 가지고 갔던 환국의 선진문물과 60진법 등은 중동의 함무라비 법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부터 400년 뒤 기록된 모세오경은 함무라비 법전과 매우 유사하다.
환웅의 무리가 태백산 지역에 가까워졌을 무렵, 3000무리 중 반고(斑固)라는 부장이 자기는 삼위산 지역으로 가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환웅이 허락하자 반고는 삼위산 현지인들을 설득하고 교화하여 나라를 세우고 반고가한(斑固可汗=왕)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한(漢)나라의 조상이다.
6개월에 걸쳐 태백산에 도착한 환웅은 신시(神市)를 도읍지로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국이라 하였다. 그는 오가(五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신지(神誌), 치우(治尤))를 두어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신지 혁덕(赫德)에게 글자를 만들게 명했는데, 그 글자가 바로 한자(漢字, 韓字)의 시초인 녹도문(鹿圖文)이다. 후일 제14대 치우천왕 때 한자가 형성되는 여섯가지 원칙인 육서법(六書法)이 주양(朱襄)에 의해 정립되었다.
BC 2333년, 마지막 천왕인 제18대 거불단천왕이 조서를 내려 웅씨국의 단군왕검(檀君王儉)을 후계자로 선포하고 배달국을 넘겨주었다. 단군왕검은 아사달(흑룡강성 하르빈)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부르고 환웅천왕의 칭호를 황제로 바꾸었다.
단군왕검 황제는 천하의 땅을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의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진한은 황제가 직접 다스렸다. 마한은 백두산 북쪽에서부터 한반도와 도서(일본)를 포함했고, 변한은 서쪽 경계를 탁예(涿芮:산서성)로 하고 남으로는 양자강 남쪽 도산(塗山:양자강 남쪽)에 이르렀다.
단군왕검 황제는 당의 요(堯)와 같은 세대였다. 당시 순(舜)은 조선의 제후였으므로 진한에 매년 네 번씩 입궐하여 단군왕검 황제를 알현하였다. 요의 덕망이 날로 쇠해져 단군왕검 황제가 순과 함께 요를 토벌하자, 요는 마침내 힘이 딸려 순에게 목숨을 의지했다.
BC 2283년, 단군왕검 황제는 운사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강화도에 삼랑성(三郎城)을 짓고 마리산(摩璃山)에 제천의 단을 쌓게 하였는데, 오늘날 강화도에 있는 참성단(塹城壇)과 전등사가 바로 그것이다. 삼랑(三郎)은 배달국의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으로서, 모두 능숙하게 영(霊)을 내려받아 예언하는 일이 많았다. 곧, 옛날에 시작된 신도(神道)이며 신의 섭리를 적중시키는 일이 많았다.
BC 2181년, 제3대 가륵(嘉勒) 단군황제는 삼랑 을보륵(乙普勒)으로 하여금 글을 창제하도록 명하여, '바른 소리 글' 즉 정음(正音) 38자를 지었으니, 이 글을 가림토(加臨土)라 했다. 이때 최초로 반란을 일으킨 우수국(牛首國)의 후예 협야노(陜野奴)가 바다로 도망쳐 일본을 점거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제13대 흘달(屹撻) 단군황제는 미혼 청년들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였으며 이들을 국자랑(國子郎)이라고 불렀다. 국자랑은 밖으로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天指花郎)이라 불렸다. 제19대 구모소(緱牟蘇) 단군황제는 국문서당(國文書堂)을 세워 백성들이 학습하게 하고 닥나무 껍질로 종이를 만들었다.
제22대 색불루(索弗婁) 단군황제는 백성들을 위하여 금지사항으로 여덟가지 법을 세워 이를 팔조금법(八條禁法)이라 했다.
1조 살인을 저지른 자는 바로 사형에 처한다.
2조 남을 치상하게 한 자는 곡식으로 형량을 치른다.
3조 도적질 한 자의 경우 남자는 그 집의 노예로, 여자는 노비로 삼는다.
4조 소도(蘇塗)를 훼손한 자는 금고(禁錮)에 처한다.
5조 예의를 지키지 않는 자는 군에 복무케 한다.
6조 게으른 자는 부역을 보낸다.
7조 요사스럽고 음탕한 짓을 하는 자는 태형笞刑을 가한다.
8조 사기를 친 자는 훈방한다.
제31대 등올(登屼) 단군황제는 행정과 사법을 분리하여 권한의 집중을 막고 공정을 기했다. 제44대 구물(丘物) 단군황제는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 하고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요령성 개원(開原)시)으로 옮긴 뒤 삼한을 삼조선이라 칭했다. 마지막 단군황제인 제47대 고열가(高列加) 단군황제는 황제의 자리를 버리고 아사달산에 입산하여 신선의 길에 오르니, 더 이상 대를 잇지 못하고 진조선(진한)은 북부여에 흡수되었다.
(사)국사바로알기중앙회 상임이사 송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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