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일본인회】위안부 문제를 발본색원할 궁극적 해결책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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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뉴스 김금산 대표 초청강연(6/6 파주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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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군과 위안부

1918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 7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이 성병에 걸려 전멸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일본군은 이런 사태의 재연을 방지하기 위해 1931년 9월 만주사변 당시의 군인 전용 공창가(公娼街)를 만든 후로 일본군이 가는 곳곳마다 위안소를 설치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위안부의 수요도 급증했으며 위안부 모집이 조선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위안부 모집은 광고 등을 통한 공개 모집이었으며, 이때까지는 조선 처녀에게도 강제성을 띠지 않았다.

그 후 신문이나 언론을 통한 광고 뿐만 아니라 납치, 인신매매, 직업 알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위안부를 모집하기 시작했고, 그 중 일부는 여성 근로자를 선발한다고 허위 광고를 내기도 했다. (미 의회조사국(CRS) 보고서)

소개업자 뿐만 아니라 동네 반장이나 경찰 등 행정조직을 이용한 동원도 늘어났다. 위안부 모집업자들은 먼저 마을의 이장과 순사들을 매수해 그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이장이 마을 사람 중에서 투전판에서 돈을 많이 잃고 빚을 진 사람을 알선해 주면, 모집업자는 그 집을 찾아가 돈을 주고 딸을 팔아달라고 권유했고, 그 옆에서 일본 순사가 압력을 넣는 식이었다. (유곽의 역사, 2012)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으로까지 일본군의 전선이 확대되자, 마침내 일본군은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관동군(關東軍)이 24만 명에서 75만 명으로 증원되자 조선 처녀 1만 명이 관동군 쪽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불충신민, 2004) 대만 총독부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위안부가 강제로 차출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운동가가 위안부 모집에 앞장서기도 했다. 수카르노는 일본군의 점령이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여기고 일본군에 대한 협력과 일본군을 상대하는 인도네시아인 위안부 모집에도 앞장섰다. (천 가지 얼굴의 이슬람 그리고 나의 이슬람, 20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에 대한 수요를 다 채울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만들어 만 12세~40세의 독신녀를 정신대의 대상자로 규정했다. 이렇게 차출된 정신대에서 위안부가 충당되기도 했다. 본래 '정신대'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근로자이며 '위안부'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불충신민, 2004)

일본군이 정복하여 주둔하고 있던 동남아시아에서의 위안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1942년부터 일본에서 알선업자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많은 돈, 가족의 부채를 없앨 기회, 쉬운 일' 등을 조건으로, 가난한 집안의 소녀들을 상대로 일본 등 공장 근로자로 알선한다고 속여 선금을 주고 데려갔다. (한국민족운동사론, 2008)

경성부 방산초등학교에서는 도덕 점수가 뛰어난 12살 여학생을 선발해 도쿄를 구경시켜 준다고 속여 6명을 정신대로 보냈고, 소학교 정신대 모집을 학교별로 배정하여 100명을 차출해 서울역에서 보냈다고 한다. 어린 여학생들에게 정신대에 가면 배고픈 일도 없고, 1주일에 한 번씩 영화를 볼 수 있고, 학교도 다닐 수도 있으며, 군수공장 같은 데서 일하면 돈도 벌 수 있다고 속여서 데려갔다고 한다. (한누리미디어, 2004)

2. 위안부 문제와 한일관계

1993년 8월 일본 고노 관방장관은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으나 그 경우도 감언, 강압에 의거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들도 많았으며, 관헌이 직접 이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1995년 일본 시민단체들이 국민기금을 모아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속죄금을 지급하는 아시아여성기금을 발족했으나, 한국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분명치 않다며 수령을 거부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위안부 관련 민간단체들이 일본 정부에게 법적 배상을 요구하면서 한국 외교부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위안부 피해자인 양금모 씨는 한일기본조약 배상금으로 성장한 포스코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한편 위안부 피해자인 심미자 씨 등은 "우리는 돈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명예다. 우리를 이용하여 국제적인 모금 활동을 하는 일은 우리를 두 번 모욕 주는 행위다"라고 비판하면서, 2004년 기독교계 정대협과 불교계(조계종) '나눔의 집'을 상대로 '모금행위 및 시위동원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그리고 "우리 정부와 시민단체 등이 툭하면 위안부 할머니들을 내세워 일본을 비판하고 일본에게 배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정작 정부와 시민단체 등이 위안부 할머니에게 해준 일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건강과 소송문제, 또 장례식 등까지 세세한 부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보살핌을 펴왔다"고 밝혔다.

2005년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입장을 밝히고, 2011년 헌재는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함으로써 한일외교의 쟁점으로 부상했다.

2015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해,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고 합의했으나,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재교섭의 의향을 피력함으로써 또다시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3. 자각과 반성ㅡ한일 양국의 공동책임

2001년 한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 모집업자에 의해 동원된 위안부는 16%인데 비해, 한국인 모집업자에 의해 동원된 여성은 29.4%였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이 직접 동원한 경우에도 반드시 조선인들의 협조가 있었다고 한다. (민족과 페미니즘, 2003)

당시 위안부 모집에 앞장섰던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기독교인이었으며, 많은 기독교 교단들은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지지하고 위안부 모집과 전쟁물자 조달에 협조했다. (동아시아와 근대의 폭력1, 2001)

1938년 6월 이화여대의 김활란, 동아일보의 김성수, 조선일보의 방응모 등이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그 회원수가 무려 3만여 명에 달했다. 장면 전 총리가 간사를 맡고,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모윤숙, 김동환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그들은 1939년 국민징용령이 공포되자 조선인을 일본의 탄광과 공장으로 보내는데 앞장섰으며, 자원입대와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도 열을 올렸다.

1938년 9월 9일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1943년 한국 기독교가 일본 기독교에 편입됨으로써 신앙의 주체성과 정절을 모두 잃고 말았다. 기독교 교단들은 위안부 모집과 전쟁물자 조달에 협조했으며(기독교 신학, 김균진), 청년들은 전쟁터로, 소녀들은 위안부로, 장년들은 탄광과 공장으로 끌려갔다.

이처럼 국가 공권력이 없어진 상황에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순진한 일반 백성들뿐이었다. 그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행동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시 국가를 이끌었던 지도층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야 한다.

따라서 위안부의 진상을 규명하고 일본 정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동조한 조선인들의 책임도 똑같이 물어야 한다. 최근 양심선언하는 일본인들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비해, 강제동원과 인신매매를 주도하여 여성들의 인권을 짓밟은 한국인들은 한 명도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거나 처벌받지도 않았다. 

먼저 우리 스스로 지난날의 문제를 자각하고 근본적으로 반성할 때 비로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4. 원수에서 형제자매로ㅡ여성자매결연

지난날 통일교회 문선명 총재는 30만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세계평화여성연합 주최로 국제적인 여성자매결연을 추진한 바 있다. '한일 여성 32만 자매결연'을 비롯해, 일본-한국,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한국-대만, 한국-태국 등의 여성자매결연이 맺어졌다.

여성자매결연은 그 취지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여성들이 '남성들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간의 증오와 갈등을 극복하고, '원수가 아닌 형제자매로서' 과거를 청산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는 취지였다. 그런 뜻에서 6일째 창조된 인간과 6천년 인류역사를 되찾기 위해, 6년에 걸쳐 국제 자매결연이 추진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문선명 총재는 한국 기독교를 대신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위안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일본의 과오를 청산하기 위해 한국땅을 찾아온 일본 대표 16만명 여성지도자들은 한국 여성지도자 16만명과 함께 '남북통일과 아시아•세계평화를 위해 목숨을 다 바쳐 사생결단할 것'을 '하늘 앞에 서약'했다. 일본 여성들이 16세 소녀 유관순의 화신체로 부활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결론적으로 여성자매결연은 소극적•과거지향적이 아닌 적극적•미래지향적인 대안이며, 일시적이 아닌 항구적인 해법으로서, 위안부 문제의 근본을 파헤쳐 발본색원한 궁극적인 해결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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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만명 일본 여성지도자 교육(위) 한일여성자매결연(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