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 한국에서는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안중근! 그가 '친한파'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과연 그가 암살한 것일까? 아니면 토사구팽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은 아닐까?
1909년 10월 26일 히로부미가 암살당하던 날, 당시 추밀원 의장이었던 히로부미는 만주와 조선 문제를 놓고 러시아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코체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갔다.
오전 9시 차내에서 코코체후의 인사를 받은 뒤 홈에서 러시아군의 사열을 받은 히로부미는 군중으로 가장해 접근한 안중근이 발사한 총탄 세 발을 맞고 약 30분 후에 사망했다. 그때 안중근은 '코레야 우라!(Корея! Ура!)'라고 러시아어로 크게 외쳤다.
문제는 히로부미의 시신에서 발견된 총탄과 총상이 안중근이 발사한 총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히로부미의 급소를 명중시킨 총탄은 케네디를 암살했던 '마법의 총알(저격수의 총알)'과 같은 것으로, 당시 안중근이 소지하고 있던 총은 7연발 브라우닝 권총이었기에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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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사용했던 브라우닝 권총은 벨기에의 FN사가 만든 것으로 권총에 새겨진 일련번호(262336)를 추적한 결과 1906년 9월 8일에 '쿤후토사'에 팔린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쿤후토사'의 주요 납품처는 러시아 육군이었다.
따라서 안중근은 히로부미를 암살한 진범을 숨기기 위해 이용당한 것이며, 진짜 범인은 러시아에 있었던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히로부미에 명중된 총알은 프랑스 기병대의 카빈총 탄환이었는데, 안중근의 브라우닝 권총으로는 카빈총 탄알을 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히로부미의 수행원이었던 무로타 요시후미 귀족원 의원은 히로부미의 몸에서 나온 총알은 안중근이 썼던 브라우닝 7연발 권총이 아니라 프랑스 기마병 총이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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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히로부미의 사체를 부검한 결과, 그에게 치명상을 입힌 총알의 탄도는 위쪽에는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결국, 암살자는 위쪽에서 아래쪽을 향해 쐈던 것이다.
그런데 안중근은 히로부미와 키가 비슷했고, 요시후미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안중근은 조금 주저앉은 자세로 쐈다고 한다. 즉, 아래쪽에서 위쪽을 향해 쐈던 것이다.
요시후미 의원은 "당시 역내 2층 식당에서 프랑스 기병총으로 쏜 사람이 있었다. ... 오른쪽 어깨에서 대각선 아래 방향으로 쏘려면 2층에서 쏘는 방법 외에는 없다. 2층은 격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아래쪽을 향해 총을 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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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총격 당시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코초후는 히로부미와 함께 플랫폼으로 걸어나와 히로부미 바로 옆에 있었지만 긁힌 자국이 하나도 없었다.
일본 외무성 외교자료관의 '이토 공작 만주시찰 건'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짜 흉악범은 안중근이 성공하자 도망쳤는가? 블라디보스톡 방면의 소식통에 따르면 저격 주모자와 저격수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왼쪽의 몇 사람들이다."
당시 안중근을 포함해 용의자로 지목됐던 25명은 바로 러시아 특무기관의 영향하에 있던 '한민회'의 조직원들이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히로부미는 러시아와 협상을 맺으려 시도했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영일동맹이 맺어지자 예상보다 빨리 러일전쟁이 개전됨에 따라 결국 러시아가 패전하고 말았다. 이에 러시아는 히로부미가 반역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에게 앙갚음했던 것이다.
또한 안중근은 히로부미의 얼굴을 잘 몰랐다. '히로부미는 키가 크다'라고 진술한 안중근 본인의 증언으로 놓고 볼 때, 키가 컸던 요시후미 의원을 히로부미로 착각했던 흔적마저 발견된다.
당시 히로부미는 일본제국이 한국을 보호하는 책임은 '부강해질 때까지'라고 주장했고, 한국병합에 극구 반대했던 초기 흥아론(興亜論)의 옹호자였으며 안중근과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국통감으로 있던 시절 히로부미는 한국을 방문한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도 있다.
"조선으로 일본인를 이주시키자는 의견이 꽤 많은 것 같은데 나는 반대한다. 조선인은 대단해! 이 나라 역사를 봐도 일본보다 훨씬 더 발전했던 때도 있었다. 이 민족이 이 정도의 나라를 스스로 경영할 능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재능면에서는 서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오늘날 이 꼴이 된 것은 인민이 나빠서가 아니라 정치가 나빴기 때문이다. 나라를 잘 다스리면 인민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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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부미가 암살된 다음날(10/27), 고종 황제는 히로부미를 '한국의 자부(慈父)'라고 부를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히로부미를 잃은 것은 동양의 위인을 잃은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를 위해 충성와 정의의 정신으로 성의를 다했다. 자기 뼈를 장백산에 묻을 각오로 한국의 문명 발달에 이바지하겠다고 했다. 일본에 정치인이 많이 있지만, 히로부미처럼 국제정치를 이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 사람은 없다. 진정 히로부미는 한국의 자부였다. 그 자부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상황을 잘 모르는 떠돌이일 것이다. 이토를 잃은 것은 우리나라만의 불행도 일본만의 불행도 아니다. 동양의 불행이다. 그 폭도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움의 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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