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한성감옥에 투옥된 이승만(29세, 왼쪽에서 3번째)은 옥중학교를 운영하며, 한글과 성경, 영어와 한문, 세계사 등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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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에서 5대 독자로 태어났다. 20세 때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해 그들을 통해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사, 노예해방, 그리고 법치주의에 입각한 정치적 자유 등을 배웠다. 이렇게 신학문을 배우면서 그는 세계의 흐름에 발맞춰 왕권주의를 타파하고 민주공화제를 주장하며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그 후 '협성회 회보'와 '매일신문'을 창간해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며 독립과 민권사상을 고취하는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이렇게 개혁운동을 벌이던 중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약 5년 반 동안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긴 널판지의 칼을 목에 쓰고 두 손이 수갑에 채워진 채 발은 차꼬에 끼워졌다.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그는 7개월 동안 꼼짝없이 목에 칼을 달고 있어야 했다.
감옥으로 손바닥 크기의 성경을 가져다 준 사람은 선교사 셔우드 에디 박사였다. 이승만은 성경을 읽는 동안 민족과 나라를 위한 십자가를 지기로 다짐하고 기도했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고 나의 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 그동안 죄수들 중 한 명은 간수가 오는지 망을 보고 다른 한 명은 성경의 책장을 넘겨주었다. 이승만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1902년 가을 전국에 콜레라 전염병이 돌아 2만 3천여명이 목숨을 잃은 가운데 감옥 안의 상황은 더 비참했다. 생지옥이라고 불렸던 한성감옥은 그야말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섞여있는 생지옥이었다. 이승만은 "성신이 나와 함께 계신 줄 믿고 마음을 점점 굳게 하여 영혼의 길을 확실히 찾았으며, 하루 열일곱 목숨이 앞서서 쓰러질 때, 죽은 자와 호흡을 상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고 시신과 함께 섞여 지냈으나 홀로 무사히 넘기고”라고 당시의 상황을 기술했다.
1905년 이승만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러·일전쟁 종결 후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존하는 데 힘써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일본과 밀약을 맺은 상황이라 두번 다시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나라를 살리려면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가 독립할 수 있다"라고 판단하고 공부에 몰두했다. 1910년까지 5년 동안 조지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을 거쳐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는 높은 문맹률과 낮은 경제 수준 그리고 공산주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했다. 그리하여 보통 수 백년 걸리는 참정권과 법치주의를 통한 기본인권법을 비교적 단기간에 확립했다. 복수정당제를 도입하고 국민들이 정치세력을 선택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민주시대를 열었으며, 인권의 근간인 재산권을 보장했다. 토지개혁을 통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경제적 자립의 기회를 주었고, 교육정책을 통해 문맹을 퇴치하고 여성들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6.25전쟁 때 UN군의 참전을 이끌어 풍전등화에 처한 대한민국을 지켰으며, 평화선을 선포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을 세계에 알렸다. 미국을 설득해 경제원조와 더불어 한미기술협력 1호로서 무기공장을 설립했다. 과학기술을 도입해 시멘트공장과 유리공장을 짓고, 미국과 국내 과학자들을 동원해 원자력 기술의 기반을 닦았다. 뛰어난 정치외교의 안목으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고, 미국을 상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다 이루지 못한 사명을 이렇게 유언으로 남겼다.
"굳세게 서서 자유를 지켜라. 일치단결해서 어서 남북을 통일하도록 우리 국민에게 바라고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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