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70주년 역사 발굴】 나는 맥아더의 '직속 통역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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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 2015년 9월호) 일본의 패전 후 연합군의 점령기 때 도쿄GHQ(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근무하면서 맥아더의 직속통역관을 역임했던 일본계 2세 남성이 현재 도쿄에 살고 있다. 조지 키자키씨(여든여섯살)다. 점령 종료 후에는 줄곧 상사맨으로 세계를 돌았고, 은퇴 후로는 각처에서 봉사활동 등을 하면서 전후 일본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다.

상식을 벗어난 일본인 차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에서 태어난 키자키씨가 GHQ의 최연소 통역관으로 일본에 온 것은 열아홉살 때였다. 메이지시대 태생의 아버지는 규슈 구마모토(熊本)에 있던 운송선 도매상의 장남으로, 증기기관차 기술을 배우기 위해 나막신과 대나무로 엮은 상자와 밀짚 모자만 지닌채 미국으로 건너가, 쓰다 우메코(津田梅子)의 동기 유학생이었던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정착했다.

키자키씨는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 열네다섯살 때에 일본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당시 편도로 만사천엔 정도였다​​. 샌프란시스코-요코하마-고베-상하이를 왕래하는 타츠타마루(竜田丸)라는 배였다.

요코하마항까지 마중나온 친척을 따라 혼고(本郷)에 있던 그의 집에 묵으면서 난생 처음으로 조국을 체험했다. 처음 본 일본은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병원으로 병문안을 갈 때 계란 여섯 개를 들고 가는 시대였다"고 키자키씨는 회상했다.

도쿄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70%는 나막신 아니면 짚신을 신었다. 아침 식사가 빵과 커피와 햄, 계란에서 갑자기 밥과 된장, 낫토, 단무지로 바뀌어 적응하는데 힘들었다.

2주 정도 체류한 뒤 귀국했지만, 1년 뒤에 2차대전이 발발하자 '적성(敵性)국 사람'이라며 캘리포니아의 툴레이크 수용소에 감금되어 버린다.

그 당시 미국에서의 일본인 차별은 상식선을 벗어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키자키 : 수용되자마자 동시에 재산도 동결되었습니다. 길을 걷다가 돌팔매질을 당하고 호텔 화장실도 쓸 수 없었습니다. '일본인 사절'이라는 딱지를 붙인 레스토랑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성국 사람'이라서?

키자키 : 같은 패전국이라도 독일인과 이탈리아인들은 수용소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또한 같은 황인종이라고 해도 중국인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그렇게 심하게 않았습니다. 저는 가끔 재일동포 친구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옛날 미국에서 있었던 일본인 차별에 비하면 당신들이 말하는 조선인 차별은 차별도 아니야. 당신들은 수용소에 갇힌 적도 없고 재산이 동결된 것도 아니잖아?"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일본인 차별은 미국의 국책이었습니다. 청일•러일전쟁에서 이기고, 유색 인종이 영토를 점점 확장하고 있던 일본이라는 존재가 미영으로서는 맘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조했고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30년대에서 40년대에 걸쳐 격렬한 배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늦기 전에 일본을 두들겨 놓아야 한다는 미국정부의 의지가 미국민을 일본인 차별로 몰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인이 미국을 증오하며 전쟁을 일으키도록 몰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수용기간은 종전까지였습니까?

키자키 : 종전 다음 해에 석방되었습니다. 수용소를 나오자 이번에는 '소집영장'이 날라왔습니다. '군속(Civilian employee)으로 소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부대는 미군 최강이라고 불렸던 일본계 부대, 즉 442부대입니다. ...... 미군 전쟁에서 항상 선두에 선 것은 일본계 부대, 흑인 부대, 중국인 부대였는데, 그 중에서도 항상 선두에서 가장 대담하게 싸운 것은 442부대였습니다. 어디를 가도 'Jap' 'Jap'이라며 차별을 받았지만, 그래도 참도 참았던 인내심이 야마토다마시(大和魂)에 불을 붙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442부대가 막강했던 비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맥아더 전속 통역관으로

소집영장에는 '희망 부임지'라는 란이 있었는데, "JAPAN이라고 쓰지마라"고 아버지로부터 주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첫 부임지가 운명의 장난처럼 "쓰지마라"고 했던 일본이었다. 그리고 GHQ의 통역관으로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했다. 보안 첩보, 검열 등을 담당하는 첩보 제2부(G2)에 배속되었다. 이번에는 군용 선박 프리그랜드호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전쟁이 이미 끝난 뒤였다. 키자키씨 등 G2 소속 군속의 숙사는 현재 도쿄타워 밑에 있는 시바다이몬(芝大門) 근처에 있었다. 전쟁 전에는 제국호텔과 같이 상당히 넓은 중화식당이었다고 한다. 그 안에 사오십 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G2의 직원들은 제각기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았고, 서로 다정하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고 키자키씨는 회상한다. 식당에서도 모두 혼자 말없이 먹는다. 군속끼리 횡적인 교류는 전혀 없었다. 아침 식사 후 방으로 돌아오면 전령이 명령서를 두고 간다.

예를들면 "○월 ○일 ○○(상관 이름)가 ​​○○ (본인 이름)에게. ○○사의 노조위원장 ○○의 행동을 확인하라. 일주일 이내에 보고할 것"이라고 써있다. G2의 군속들은 모두 명령서에 따라 활동하고 있었다. 본부에는 미국제 윌라라는 지프를 타고 통근했다.

탁월한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은 키자키씨는 바로 맥아더 원수 직속통역관이 된다. 키자키씨가 일본어에 능통했던 것은 양친 덕분이기도 하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개교하여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라후(羅府)중앙학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후중앙학원이라면 북미 최초의 일본어 학교로 유명하지요?

키자키 : 그렇지요. 모두 합치면 이삼십 명의 학생들이 일본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모두 일본계 2세였다. 교정에는 일본에서 몰래 가져온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은 나중에 일본항공 전무에서 회장이 된 이토 료헤이(伊藤良平) 선생이었습니다. 이토 선생은 낮에는 라후중앙학원에서 가르치고 밤에는 일본군을 위해 미국내 정보수집 활동 같은 것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함께 일본어를 배운 동창생들도 대부분 같이 GHQ에 스카우트되었습니다. 대략 10만 명 정도였던 GHQ 인력 중 약 2만 명이 저와 같이 일본계을 중심으로 한 통역관이었습니다. 당시 GHQ에는 법률, 정치, 경제, 종교, 사상, 문화, 교육, 연료, 전기, 수도, 음식 ...... 등등 전 분야에 걸쳐 통역관이 있었습니다. 저는 종교를 포함한 사상담당 통역관이었습니다.

GHQ 통역관의 철칙

"아무 생각없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단어를 번역하면 그 뿐이다. 대화 내용은 일체 기억하지 말라. 상대방 얼굴도 기억하지 말라."

키자키씨는 상관으로부터 그렇게 주의를 받았다. 그것이 GHQ 통역관의 철칙이었다.

북쪽으로는 북해도 왓카나이(稚内)에서 남쪽으로는 가고시마 천문관(鹿児島天文館)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GHQ 행정출장소가 있었고 통역관이 있었다. 키자키씨의 말처럼 그 숫자는 12만명.

맥아더의 전속 통역관은 키자키씨를 포함해 몇명 정도 있었나요?

키자키 : 15명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장군 주변에 상주하는 직원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 맥아더 장군께 확실하게 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암호가 있었습니다. 《HQ and HQ United States 8th Army No. APO500.》

문두에 이렇게 쓰면 직접 장군께 전달됩니다. 'Dear Sir'라든가 'Dear General'이라고 쓰면 전달되지 않게 되어 있었습니다. ...... 정보처리에 있어서 맥아더는 그야말로 컴퓨터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국내는 물론, 워싱턴, 뉴욕, 로스앤젤레스, 하와이, 괌, 조선, 대만, 구만주, 싱가포르, 홍콩, 필리핀......과 북미에서 태평양 및 일본이 점령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사방에서 온갖 정보가 맥아더에게 집약되었고, 그 하나 하나에 대해 정확한 답변을 했습니다.

점령기간 중 맥아더는 아시아 태평양지역을 오가는 모든 정치·군사 정보의 요체였으며 허브였습니다. ...... 휴일에도 일체 관광을 하지 않고 자기의 방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점령이 8년만에 끝난 것은 맥아더 장군의 맹렬한 아니 초인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격이었기 때문에 첫 대면 때 장군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애매한 표현을 썻다가 "Answer Yes or No!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 뿐이다. 확실히 대답할 수 없다면 돌아가라"고 고함치는 바람에 간이 콩알만해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GHQ 내의 공​​산주의자들

키자키씨가 직속 통역관으로 배속 된 1949년 당시, 맥아더 GHQ의 일본통치에 있어서의 최대 현안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던 공산주의 세력을 어떻게 진화시킬 것이냐는 문제였습니다. 공산주의자는 GHQ 내부에조차 있었습니다.

GHQ 내부의 좌파였던 민정국(국장 토니 휘트니)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형성된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불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이 잠입해 있었기 때문에, 46년에 공포된 일본 헌법초안 작성 때에 일본인 학자와 많은 프랑크푸르트학파들이 포함되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맥아더 자신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점령 직후부터 헌법이 공포된 46년 경까지는 좌경화를 민주화라고 위장한 민정국(民政局)에 좌지우지된 감이 없지 않다.

맥아더가 명확히 노선전환을 시도한 것은 2·1총파업 중지를 결정한 1947년이었다.

맥아더 명령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이이 야시로(伊井弥四郎) 全관공서공동투쟁위원장은 NHK라디오의 마이크를 향해 "목소리가 쉬어 잘 들릴지 모르지만 긴급하고 중대한 사안이므로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총파업 철회를 눈물로 발표했다.

"지금은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라디오를 통해 친애하는 전국의 관료, 공사, 교원 여러분께 내일 열릴 예정이던 총파업 중단을 알려드립니다. 진실로, 진실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조합원 제군에게......"

그 이후 GHQ의 '역코스'는 49년의 적색분자 색출로 일본 공산당원과 1만명 신파(新派)의 공직 추방으로 이어진다.

G2군속이었던 키자키씨의 책임은 통역과 함께 소련이나 중국에서 돌아오는 귀향 선박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종전 당시 소련 국경 주변과 조선, 사할린, 쿠릴에는 군민을 합쳐 250만명 이상의 일본인이 있었는데, 그 중 백만 명 이상이 소련군과 중국군의 포로가 되어 강제노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공산주의에 세뇌되어 돌아오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또는 극소수지만 전전전중(戦前戦中)에 자진하여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몸을 담았던 일본인이 군인으로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다.

키자키씨는 'PollEx' 16미리 영사기와 'Speed Graphic' 대형 카메라를 들고 마이즈루(舞鶴), 우베(宇部), 우지나(宇品, 히로시마), 사세보(佐世保) 등의 항구에서 귀국선을 타고 돌아오는 공산주의자와 마중나온 자를 감시하고 있었다.

모두 의연했던 귀환병

가장 기억에 남는 항구는?

키자키 : 역시 귀향선박 수가 가장 많았던 마이즈루입니다. ......그 당시 도쿄에서 교토까지 편도로 15 시간이나 걸렸다. 기차에는 반드시 RTO(Railroad Transportation Office=철도수송국)라는 GHQ 전용 차량이 있어, 우리는 이 칸에 타고 이동했다. 점령으로부터 1955년 무렵까지 이 RTO가 국철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역에서 마이즈루항까지의 이동은?

키자키 : 군용 지프입니다. 항구에서는 GHQ 텐트 속에서 귀국 선박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천톤급 배인 경우 1만명 가량 귀환자들이 북적거렸다. ......부두에는 젊은 미군 병사들이 쭉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는 귀환병들의 등에 구멍뚫린 판자를 대고 백색 페인트를 칠하면 간단히 "PRISONER"(포로)라고 찍힙니다.

......병원용 잠옷 같이 창백한 사람, 절름발이, 전신을 붕대로 칭칭감은 사람, "드디어 돌아왔다"고 외치며 입 속에 모래를 쑤셔넣는 정신나간 사람 ......그야말로 가지각색이었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귀환병은 두꺼운 외투를 껴입어 허리에 반합과 물병을 달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세뇌되어 적기를 휘두르며 '인터네셔널'을 노래부르면서 하선한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지에 내리자마자 "일본 인민을 위하여 싸우자"라고 절규했습니다. 한편 전혀 세뇌받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다른 쪽에서는 "천황폐하 만세"라고 대합창을 했습니다.

GHQ는 텐트 속에서 귀환병을 한사람씩 불러 신체검사와 신원확인을 하면서 사상도 점검했다. 키자키씨도 거기에 있었다.

키자키 : 군인들은 먼저 머리에 컵 두 개 분량의 DDT를 뿌린 후 텐트 안으로 들어온다. 오랜 포로생활로
너덜너덜해진 군복이었지만, 일본 병사들의 모습은 모두 의연했다. 한 발 텐트 안으로 들어서서, "○○ 일병 지금 귀환했습니다"하고 발뒤꿈치를 붙이고 경례한다. 패전했다고는 하나 일본 군인은 역시 훌륭하다고 다시한번 생각했습니다.

자세한 심문을 거쳐 겨우 풀려나면 밖에서 가족들과 함께 고향 애국부인회와 소년 소녀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일장기를 흔들며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누군가가 수동 축음기로 '이국의 언덕'(시 리어 억류자 사이에서 불려졌다고 하는 작자미상의 노래)을 틀어준 적도 있었다.

공산주의자 구별법

그 가운데 일본인 공산주의자들이 섞여있었군요?

키자키 : 그렇습니다. 재일 조선인을 포함해 잠복해 있던 일본공산당원들입니다. 그들이 들고 있었던 것은 주로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귀국하는 일본인 고급 공산당원들이었습니다. 그런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 그들은 적기를 휘두르지 않습니다. 전장에서 사망한 일본 군인 행세를 하며 몰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 공산주의자를 구별합니까?

키자키 : 그래서 마중나온 군중 속에서 누가 잠복해 있는 일본공산당원인지 파악해 두는 일이 중요했다. 사전에 사진이나 영상을 비교해 "이 자는 요전에도 왔는데"라든가, "이 사람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몇번이고 뒤돌아보며 경계한다"는 식으로, 마중나온 공산당원을 색출했습니다.

그 외에도 잠복 일본공산원은 유별나게 깃발을 흔드는가 하면, '일본'이 아니라 '조국'이라고 말하는 등의 특징이 있었다. 귀환병이 배에서 내려와 누구와 접촉하느냐에 따라 국제공산주의운동 에이전트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를 지목한 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키자키 : 제 일을 거기까지입니다.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 공산주의자를 미행하는 일은 플로리다 경찰과 시카고 경찰에서 파견나온 전문 특수대가 수행했습니다. 물론 일본계가 많았지만 다른 동양계 미국인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부르는 특별한 호칭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Dog Tag'(인식표)라고 불렀습니다.

마중나온 공산당원들은 귀환병 가운데서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구별했습니까?

키자키 : 최대 수수께끼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 단파로 발신되고 있던 일본어판 북한 평양방송 속에 암호가 섞여있을 것이라는게 특수대의 추측이었지만 결국 판명되지 않았습니다.

골수 공산주의자를 미행한 것은 GHQ 뿐만이 아니었다. 旧육군 나카노(中野)학교 출신이 많았던 일본 공안도 코민테른의 에이전트 색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감시만 하는 정도였다. GHQ가 공산주의를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나 중국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체포할 수는 없었다. 동시에 일본정부 병사에 대해서는 느슨했다. 이렇게 귀환한 일본인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에 복귀해 관공서나 기업에 침투했고, 노조 투사로서 전후 노동운동의 핵심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한국전쟁

그런 식으로 키자키씨는 도쿄와 귀향선이 도착하는 항구를 백번 이상 왕복했는데, 바로 그 때 공산주의의 위협이 본격적으로 일본열도를 압박했던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다.

그해 유월 36도선을 군사 돌파한 김일성의 북한군은 눈깜작할 사이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남단까지 밀고내려간다. 즉각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 주변을 비밀리에 정찰한 맥아더는 약 7만 명의 연합군을 적의 배후에 착륙시키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맥아더 자신이 "성공률은 0.02%"라고 말했을 정도로 대담하고도 무모한 도박이었다.

9월 들어 작전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부대의 이동이 있었다. 도쿄에 있던 병사들은 어두컴컴한 밤을 틈타 자마(座間)로 이동한다. 키자키씨도 그 속에 있었다.

역시 통역관으로

키자키 : 맥아더 직속 제8군 소속 정보병으로 참가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어는 통했지만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 목적은 통역이지만 총기도 지니고 있었다. 통역 겸 전투원입니다. ...... 그런 상황의 기억이라는 것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 6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자마 캠프에서 6톤 트럭을 타고가 미군 비밀기지가 있었던 지금의 요코하마 노스독에 도착했습니다. 노스독부두 주변은 전부 창고였다. 3층 이상의 건물은 거의 없었습니다. 거기에 미육군 기지가 있다는 것은 GHQ 내에서도 극비였습니다.

왜냐하면 전면 항복한 일본군이 실은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봉기할 틈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요코하마 노스독은 일본군 게릴라 부대의 기습 반란에 대비해 잠복해 있던 미군의 비밀 기지였습니다.

대기병들과 합류한 것이군요?

키자키 :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6, 70인승 LST(조립식 전차 상륙함)에 탓습니다. 구레마린사의 고속 엔진을 탑재한 배로 통째로 수송함에 싣습니다. 병사들에게 상륙지점이 인천이라고 알려진 것은 수송함이 해상에 나온 9월 14일 오후였다. 기습작전은 완전히 극비리에 결행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항만 노동자 중에는 재일 조선인이 많았기 때문에, 만약 북한과 연결되어 있는 조선인 공산주의자에게 정보가 누설되면 배에 폭탄이 설치될 수도 있었다. 솔직히 저도 이 전쟁에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을 재평가 해야

그렇게까지 엄중하게 경계태세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정보가 샜습니다. 인천 앞바다에 수많은 기뢰가 설치되어 있었고, 계속해서 수중 폭발이 있었다고 한다.

우라가(浦賀)에서 다시 대형 선박에 갈아탄 부대는 사세보(佐世保)를 경유하여 다음날 아침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먼저 대기하고 있던 배와 나중에 온 배와 합류해 대선단을 편성했다. 이렇게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결행되었다.

키자키 : 기적적인 대성공이었습니다. 연합군라고 하지만 실제로 싸운 것은 대부분 미군이었습니다. 요코하마 노스독에서 출항한 미국 젊은이 여섯 명 중 한 명 즉 약 5 만명이 희생되어 한반도 적화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젊은이들만 앞장세울 수는 없다"며 선두에 섰던 분이 당시 이미 칠순의 맥아더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인은 맥아더와 미군에 대해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몇 년 전에 인천을 방문해 보니 장군의 동상 주변에 꽃한송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부끄럽기 짝이없습니다.

맥아더에 대해 재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일본인도 마찬가지다. 만일 점령군 최고사령관 맥아더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일본은 분단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천황제가 폐지되고 쇼와(昭和)천황은 사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본의 일부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농담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고 키자키씨는 힘주어 말한다.

키자키 : 일본 점령 후 소련, 중국, 영국, 호주는 천황제 폐지를 주장했다. 만일 맥아더가 최고 사령관이 아니었다면 거의 100% 천황제는 폐지되었을 것입니다.

분할통치를 가장 원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키자키 : 그야 물론 스탈린이지요. 일본 분할통치론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북해도와 동북은 소련, 관동(関東)에서 간사이(関東)까지 미국, 중국(中国)과 큐슈(九州)는 영국, 시코쿠(四国)を)를 중국이 통치하는 사분할 통치론과 그외에도 삼분할 통치론, 오분할 통치론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생각은 어쨌든 미국에게 가장 좋은 곳을 주고, 그 배후에서 자기나라 영토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미국은 원폭을 사용하겠다"고 단호히 거부했던 사람이 맥아더였습니다.

만약 맥아더가 아니라 아이젠하워나 아이켈 버거가 최고사령관이었더라면 그렇게까지 강경한 태도를 취했을지 여부는 매우 의심스럽다. 만일 분할통치가 실현되었다고 한다면 일본은 이웃나라와 같은 분단국가가 되어 국토의 일부는 적화되었을 것입니다.

'열두살' 발언의 진의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갑자기 해임당한 맥아더가 하네다공항에서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미국으로 귀국한 날은 1951년 4월 16일이었다. 공항까지 가는 길가에는 작은 깃발을 흔들면서 배웅하는 2십만 명의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러나 '새로운 하나님=맥아더'라는 이미지는 다음달부터 무너지게 됩니다. 51년 5월 미상원군사외교위원회에서 "일본인은 열두살 소년이다"라는 맥아더의 발언, 이른바 '열두살 발언'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일본에서의 맥아더 열풍은 단번에 식어버린다. 미쓰이, 아지노모토, 일본광학공업 등 민간회사가 공동으로 "열두살이 아닙니다"고 신문광고를 낸 이야기는 유명한데, 한 달 전의 일본의 구세주 맥아더라는 이미지는 완전히 추락했다. '맥아더=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이미지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 눈으로 봐도 사실 당시 일본은 열두살이었던 것같다"고 키자키씨는 말한다.

키자키 : 군사면에서는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하지만, 그외 사회인프라면에서는 아직 제국호텔 바로 옆에 있었던 오물수집회사가 농가에 판매하는 분뇨를 모으고 있었던 시대입니다. 오물수집회사의 소나 말의 똥을 주워 비료와 연료로 파는 장사도 있었습니다.

빈번히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현실을 가리켜 맥아더가 "일본은 아직 성장 도중의 소년"이라고 말한 것은 망언도 실언도 아니다.

또한 같은 의회에서 그는 일본인에 대해 "승자에 아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만, 이것도 사실입니다. 패전을 맞이한 일본인은 하룻밤 사이에 맥아더를 '새로운 하나님'으로 환영했습니다. 숭배의 대상을 새로운 통치자로 바로 바꾼 것은 일본인의 정신연령이 아직 미숙하다는(열두살) 증거입니다. 맥아더는 '새로운 황제'였습니다.

"맥아더는 인종차별주의적으로 일본인을 업신여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키자키 :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예를들면, 루손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사실을 알게된 맥아더가 "일본인이 전투기를 탔을 리가 없다. 조종한 것은 독일인"이라고 보고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전혀 사실무근입니다. 그는 일본군의 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원래 미군 가운데에 일본계 부대인 442부대야말로 당시 '세계 최강의 부대'라고 불렸던 부대였습니다. 가령 그에게 차별의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인의 평균적인 감정에 비해 훨씬 적었을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기독교는 차별을 허락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청교도였던 맥아더는 입버릇처럼 "첫째 성경, 둘째 미국 헌법에 충실하라"였습니다. 맥아더 명령에 따라 미국에서 긴급 수입된 DDT 페 니시린, 그리고 식량....... 그 덕분에 폐허 가운데에서 일본은 급속도로 회복되어 오늘날의 발전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본인은 맥아더에게 감사할 줄 모릅니다. 종전 직후처럼 하나님처럼 숭배하라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좀 더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냉정한 이론가이면서 한편으로 정의감 넘치는 격정가이기도 했던 맥아더는 부하들 앞에서 연설하다가 흥분하면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나 파이프로 탁탁 책상을 두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의 파이프는 맥아더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옥수수 파이프는 아니었다.

키자키 : 맥아더는 자신의 신격화에 대해 신경질적일 정도로 예민했습니다. 옥수수 파이프는 군인으로서 일부러 거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장식품이었습니다. 실제로 실내에서 사용했던 것은 메시라무 같은 고급 브랜드 파이프였습니다.

키자키씨는 이렇게 해서 파손된 스틱과 파이프를 받아 수리해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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