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 통일】 70년 포로 및 귀환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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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3일 뉴욕성결교회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뉴욕포럼'에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허문영 박사는 '신사참배'가 남북분단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허 박사는 1945년 8•15 해방과 그에 수반된 '국토분단', 1948년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정부 수립에 따른 '주권분단',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3년간의 동족상잔과 '국민분단'의 단계를 거쳐, 영토, 주권, 국민이 총체적으로 분단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가 남북분단의 근본 원인이며, "금년은 '국토분단' 70년째 되는 해"라고 강조했다.

1930년대에 천주교와 감리교는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 의식이라고 해석하여 받아들였다. 결국 장로교도 총독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차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그 결과 1943년에 일본 기독교에 편입된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단절되었고 신앙의 주체성과 정절을 빼앗기고 말았다. '조선기독교혁신교단'은 모세 5경과 다니엘서를 배제하고, 4대 복음서를 제외한 요한계시록 등 신약성서를 모두 삭제하기로 했다. 또한 많은 기독교 교단들은 종군위안부 모집과 전쟁물자 조달에 협조하여(기독교 신학, 김균진), 청년들은 전쟁터로, 소녀들은 위안부로, 장년들은 탄광으로 공장으로 끌려갔다.

한편 신사참배를 결의한지 10년째인 1948년 9월 9일 북한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1958년 9월 9일 북한의 모든 교회들이 폐쇄되었다. 회개와 부흥으로 축복받았던 평양의 장대현교회 자리에는 김일성 동상이 세워졌다. 마치 천년 역사를 자랑하던 러시아 정교회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교회들이 박물관 같은 용도로 쓰여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허 박사는 솔로몬의 우상숭배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가결로 영적으로 무너진 결과 남북으로 분단됐다고 말한다. 그 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멸망되어, 유다의 우수한 인재들은 대부분 포로로 끌려가고 비천한 백성들만 예루살렘에 남게되었다.

우상숭배의 나라 바벨론으로 끌려간 다니엘은 유대인을 해방시킨 당대의 의인이었다. 그는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자기와 백성의 죄를 회개했으며, 이윽고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어 유대인들은 죄를 용서받고 해방될 수 있었다(단9:3-24). 그들은 바벨론에 끌려간지 70년째 되던 해부터 3차에 걸쳐 귀환하게 되는데, 가나안으로 돌아온 그들은 에스라의 지도 아래 지난날의 잘못을 민족적으로 회개했다.

그에 비해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아직 공식적으로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다. 해방 후 양심적인 목사들은 한국 교회의 순결과 회개를 촉구했지만,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거부했다. 그 결과 고신(고려신학교)측이라 불리는 새로운 총회가 출현함으로써, 원래 하나였던 한국 장로교는 분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Daniel.jpg사자굴 속의 다니엘, 단 6:1-10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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