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큰 용기를 얻은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은 30년만에 폭설이 내린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독립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독립을 이해했던 일본 지식인들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나이 다쿠조(花井卓藏),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같은 탁월한 변호사들은 체포된 9명에 대한 내란죄 적용을 논박하여 결국 출판법 위반으로 무마시켰습니다.
저명한 인권변호사 후세 다츠지씨는 조선인 이재민의 구호와 인권옹호에도 힘써 조선총독부도 그를 부담스러워했고, 조선인들은 '우리의 변호사 후세 다츠지'라고 존경했습니다. 또한 데모크라시의 대표적 사상가였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씨는 '독립운동의 근거지' YMCA를 일본기독교회 관할하에 두려던 계획을 꾸짖어 좌절시켰습니다.
이와같이 극소수였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 지식인들과 조선인의 훌륭한 교류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씨, 신민회와 3·1운동 변호를 맡은 하나이 다쿠조(花井卓藏)씨와 우자와 소오메( 澤總明)씨,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학살을 비판한 야마자키 게사야(山崎今朝彌) 변호사 등등.
또한 이로카와 고타로(色川幸太郞) 변호사는 전남 하의도농민조합 결성을 지원했고, 고이와이 기요시(小岩井爭) 변호사는 하의 농민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 때 무료변론을 자청했습니다. 대중운동가 아사히 겐즈이(朝日見瑞)씨는 하의도농민조합을 결성하여 소작쟁의를 이끌었습니다. 당시 식량수탈은 대륙침략의 발판이었으므로, 소작쟁의는 목숨을 건 생존권 투쟁이자 독립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아사히는 조선인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조선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하의3도농지탈환운동 김학윤 기념사업회장은 '우리의 은인'이라고 말했습니다.
함흥 흥남에서 적색노조활동을 이끌고 10년간 수감된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씨, 어린 시절 조선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조선인의 반항운동에 동정"하여 조선을 사랑했던 여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조선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조선 땅에 묻혔습니다.
이와같이 한일관계 속에는 갈등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인에 의한 우호적 관계도 있었습니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일본인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은 일본내 양심적인 시민운동그룹과 지식인에게 큰 힘이 될 것이며 앞으로 더욱 발굴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2004년 후세 다츠지씨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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