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1949년 6월 15일, 재일동포 사회에 하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부인회 총본부(현 중앙본부)의 탄생이다. 초대 회장에는 당시 민단 중앙 여성부장이었던 오기문(呉基文)씨가 취임했다.
부인회의 역사는 재일동포의 역사이기도 하다. 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뜨거운 열정으로 극복해왔다.
6.25전쟁 중인 1952년말부터 한국을 방문하여 환자 위문 및 피난민 구호물자를 전달했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부상하여 일본 각 병원에서 치료 중이던 유엔군 부상병을 위문하는 한편, 한국 인형을 기증하여 부상병들이 고마워했다.
1964년 10월 10일 개최된 동경올림픽에 한국에서 사상 최대로 212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개회식 당일, 경기장 입구 길가에서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머니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환영, 한국 선수들이 한국에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등 부인회 특유의 격려를 했다.
1978년 2월 26일 '폭 넓은 교제를 통한 좋은 동족의 반려를'이라는 슬로건 하에, 오사카 본부가 최초로 소개팅 '큐피트 세레모니'를 개최, 이후 각 지방본부 결혼상담부가 중심이 되어 전국화되었다.
1982년 1월부터 88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해 20만명의 회원이 '1일 10엔 모금'을 6년간 계속하여 모은 성금으로 한국의 관광명소에 고정식 화장실, 올림픽 경기장에 이동식 화장실을 설치했다. 또한 같은 해 개최된 장애인 올림픽에도 1억원의 성금을 기탁했다.
1984년 6월 부인회 전국 대표 84명이 뉴욕 유엔본부를 방문, 사무총장 및 인권위원회에 외국인등록법의 근본적인 개정을 일본 정부에 권고하도록 청원했다. 또한 사할린 잔류 한국인의 조기 귀환도 호소했다.
1984년 10월 5일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상징하는 외국인등록법을 어머니와 자녀들의 힘으로 개정시키기 위해 과감하게 지문 거부운동에 참여했다. 부인회와 청년회의 대표 1,000여명이 동경에 집결, '외국인등록법 개정 투쟁 재일 한국청년 부인회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행진했다.
1995년 1월 17일 새벽에 발생한 한신·아와지 대지진(阪神·淡路大震災) 당시, 부인회는 피해 지역의 민단지부 앞에서 식사를 공급하고 이재민들에게 전면 배급했다. 동포 뿐만 아니라 일본인 피해자도 많이 모여 지역 주민으로서 민족과 국적을 초월한 구제운동을 전개했다.
1997년 한국 경제가 IMF 관리하에 처하게 되자 외환 위기에 대한 지원운동의 일환으로 민단, 한상(韓商)과 함께 '한 세대 10만엔 이상 본국송금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올해 103세를 맞이한 초대 회장 오기문 고문(1912년~)은 1949년 6월 부인회 창립 당시부터 1967년 6월까지 6.25 한국전쟁의 위문 및 구호 활동과 그 후의 빈곤구제운동, 1959년부터 시작된 조총련 동포 북송저지운동, 1964년 동경올림픽 후원사업, 1965년 체결된 한일회담 당시의 법적 지위 요구 관철투쟁 등 격동의 초장기 18년을 이끌어 조직의 토대를 마련했다. 6.25전쟁 당시 오 고문의 아들이 참전하여 전사했다.
재일 한국부인회 중앙본부(여옥선 회장)는 3월 28일 임기 만료에 따른 회장 선거를 실시한다. 시가현 쿠사츠시의 대오그룹 박선악(朴善岳) 대표이사가 단독 출마했다.
충주시와 UN평화공원에 2천 325억원 규모의 투자 협약을 체결한 대오산업(주)은 일본 시가현 쿠사츠시에서 환경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대오그룹 17개 계열사의 주력 기업으로 직원 1천 200명, 연매출 130억엔의 우량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대오산업의 창업자는 충주시 칠금동(漆琴洞) 출신으로, UN평화공원 관광지의 민간 지역에 2만 8천 172 ㎡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UN평화공원 조성사업을 위한 토지 보상 때부터 민간 사업에 관심을 보여왔다.
대오산업(주)은 2019년까지 21만 3천㎡의 부지에 호텔과 콘도 등의 숙박시설과 물놀이, 게임장 등 가족형 놀이시설이나 상가 등을 건설, 운영할 계획이며, 충주시는 기반시설과 인허가 등 적극적인 행정적 지원에 나설 방침이다.
この記事へのトラックバック
この記事への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