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年06月22日

【6.25특집】김백일 장군 "건군의 주역, 38선 돌파의 일등공신, 피난민의 아버지, 통일의 역군"

PicsArt_06-22-09.38.53.jpg21일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김백일 장군 순국 66주기(탄생100돌) 추모학술회의. (사)실향민중앙협의회(회장 노학우)•(사)한국문화안보연구원(원장 김동명) 주최 /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후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김백일은 어려서부터 조부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조부인 김영학 선생은 1910년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북간도로 이주하여 후일 '간도 3.1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애국투사였다.

장래 조국을 위해 현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군인이 필요하다는 조부의 조언에 따라 김백일은 만주국의 봉천군사학교에 입학, 졸업 후 중국공산게릴라 색출을 위해 창설된 간도특설대에서 중대장으로 복무하다 해방을 맞이한다.

그런 와중에서 당시 인민군 창설을 위해 유능한 인물을 물색하던 김일성이 그를 찾아와 "나와 같이 인민군을 하자. 미군놈들을 몰아내고 미군에게 붙어먹는 민족 반역자를 싹쓸히 해야 통일이 된다"며 권총을 꺼내들고 위협했다. 이렇게 3일 동안 시달리던 김백일은 자신이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힌 후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월남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전북 이리(익산)에서 창설된 제3연대 연대장을 거쳐 전투사령관, 학교장, 군수부대지휘관, 참모부장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이와 같은 그의 풍부한 전투 경험들은 후일 6.25전쟁 때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방어선이 붕괴되자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옮겨지고, 김백일 작전참모부장은 개전 초기에 피해를 입은 국군을 재편성하여 8개 사단을 5개 사단으로 축소하고 국군 최초의 군단을 창설했다.

당시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수원의 한 초등학교로 이동한 육군본부에 들렀을 때 마침 작전참모장 김백일 대령이 흑판 위에 '국군재편성계획'을 작성하고 있었다. 한강이북에서 결단난 부대들을 합병•통합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국군재편성계획을 마친 후 1군단 김홍일 군단장을 보좌하며 낙동강 동부전선에서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던 중 김백일 참모부장은 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이후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격멸시키고 동부전선을 사수함으로써 반격작전을 개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이윽고 총반격작전이 개시되자,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제1군단 3사단은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는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했다
PicsArt_06-22-09.44.44.jpg김백일 제1군단장(오른쪽)이 38선 돌파 직후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기념비에는 ‘아아 感激(감격)의 三八線(38선) 突破(돌파)’라고 적혀 있다.
이어서 북한 제1의 항구인 원산 탈환작전이 개시되었다. 제1군단 산하의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각각 원산시의 서쪽과 동쪽을 협공하는 작전으로 오전부터 이루어진 두 사단의 공격으로 마침내 10월 11일 원산을 탈환했다.

원산 탈환 소식을 전해들은 맥아더 장군은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을 통해 김백일 장군에게 '레전드 오브 메리트(Legion of Merit)'를 수여하고, "한국군 1군단 전 장병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제1군단이 함흥에 이어 청진과 해산진까지 진격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제 우리의 소원이던 국토통일을 눈 앞에 두게 됐습니다. 그러한 즉 우리는 잃었던 국토 위에 우리 스스로의 힘과 얼로써 훌륭히 정치해 나갈 수 있는 채비를 해야만 하는 것"이라며 함흥을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

이제 모두가 통일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게 왠 날벼락이란 말인가? 갑자기 철수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견디지 못해 서부전선이 붕괴되고, 특히 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교묘한 우회기동전략으로 아군의 피해가 속출했다.

통한의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바다를 통한 해상철수였다. 하지만 김백일 장군은 북한 피난민 수송을 군 작전보다 중요시했다. 제3사단장 최석 준장,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 군단민사처장 유원식 중령 등을 긴급 소집하여 피난민 대책회의를 열었다.

김백일 : 우리 1군단이 피난민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조국애와 인류문명에 반하는 행위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을 데려가겠다. 그것이 구국의 사명이다.

최석 : 철수작전에 지장이 생긴다 해도 피난민을 저버릴 수는 없다.

유원식 : 처음에는 함경북도 지사와 시인 모윤숙의 숙부, 그리고 저명한 목사까지 단 3명만 데려가겠다고 하다가, 우리 민사처의 끈질긴 교섭 끝에 미 10군단이 3천 명까지는 태워주겠다고 합니다.

김백일 : 끝까지 교섭을 벌이시오. 정 못하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배를 갈라 보이시오. 귀관들은 부대로 돌아가는 즉시 해안의 모든 배를 징발하시오.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배를 징발하여 피난민을 태우시오.

송요찬 : 우리 대신에 피난민을 태워보내고 국군은 걸어서 원산을 돌파합시다. 수도사단이 앞장서겠소.

김백일 : 좋은 각오다. 나 자신도 그럴 각오로 있다. 애들(장병들)의 생각은 어떤가?

최석•송요찬 : 각급 지휘관, 분대장, 병사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이다. 동포애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피난민 후송 계획을 김백일 장군으로부터 전해들은 알몬드 소장은 "한국군이 그렇게까지 결심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며 3천 명만 태우겠다던 기존의 방침을 바꿔 최대한 많이 태우기로 했다.

흥남 철수 작전 당시 군수참모였던 김용기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김백일 군단장은 참모장인 김종갑 준장과 운송책임관인 군수참모와 함께 끝까지 현장을 지키며 피난선의 승선과 수송을 지휘했다고 한다.

또한 헌병참모 김득모는 "우리는 소형 선박을 약 200척을 모아서 민간인 철수에 대비하였고, 나중에는 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알몬드 소장과 협의하여 LST에도 태울 수 있는 대로 태웠는데, 최소한 15〜20만의 피난민을 수송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PicsArt_06-22-09.39.34.jpg주제발표 및 토론 : 왼쪽부터 이준구 박사•고우성 박사(김백일 장군의 가계와 건군활동), 온창일 박사(좌장), 이상호 박사•손경호 박사(기계-안강전투/북진작전과 흥남철수작전), 남정옥 박사•나종남 박사(김백일 장군의 건군과정과 6.25전쟁에서의 역할과 업적)
이와 같이 김백일 장군은 공적인 일에 있어서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주어진 직책과 책임감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합참의장을 역임한 한신 대장은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그러면서도 돌아서서는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정감이 풍부했던 장군"이라고 그를 높이 평했다.

전쟁은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면서 낙동강전투 이래 또다시 최대의 시련을 맞고 있었다. 38선을 넘어 다시 북진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김백일 장군의 지휘•통솔력이 절실한 때였다.

그런데 중공군의 공세에 대비하기 위해 군단장회의 참석 후 복귀하던 도중 김백일 장군은 타고 있던 비행기가 악천후로 인해 태백산 계곡(강원도 대관령 인근의 발왕산 중턱, 지금의 용평스키장)에서 추락함으로써 전사하고 말았다.

김백일 장군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군의 큰 별이 떨어졌다며 크게 애통해 하면서 "김 장군의 유일한 목적은 언제나 변함없이 남북을 통일해서 국권을 회복하는데 있었으니 김 장군을 사랑하는 우리로서는 그 정신을 받들어 같은 결심으로 끝까지 용감하게 싸워 김 장군이 다 이루지 못한 역사를 완성하기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고 위로했다.

육국본부는 비문을 세우고 "그 기개는 산하를 삼킬 듯하고, 용맹은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였다. 장군의 외외(巍嵬)한 공훈과 충열은 길이 사기를 북돋아 줄 것이요, 또 영령은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고 새겨넣어 그의 공을 기렸다.

김백일 장군은 34년의 삶과 5년간의 짧은 군 생활에도 대한민국 국방사와 6.25전쟁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국가와 군의 발전에 크게 쓰일 인재들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그들을 과감히 발굴하여 국가의 대들보로 키운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가 제3연대장으로 있을 때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장교들은 모두 대한민국을 이끈 동량이 되었다. 김종오 소위는 6.25전쟁 초기 춘천대첩을 통해 북한군 2군단의 한강이남 진출을 막고, 백마고지전투를 통해 중공군 3개 사단을 괘멸시킨 용장이었다. 이한림 소위는 전역 후 건설부장관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주역이 되었으며 정래혁 소위는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오늘날 김백일 장군은 건군의 주역, 최고의 야전 사령관, 낙동강에서 조국을 구한 지휘관, 38선 돌파의 일등공신, 북진작전의 선봉장, 피난민의 아버지, 통일의 역군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6.26를 앞두고 다시 한번 장군의 위국헌신의 애국정신을 되새기자.
추모시 '백일교의 꿈' 장순휘 교수
【종전 71주년 기념】 맥아더의 직속 통역관 키자키씨 "전후 평화의 원점을 직시해야"
【전후 70주년 역사 발굴】나는 맥아더의 '직속 통역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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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年06月20日

【사법개혁】'엄정한 독립'과 '절대 고독'의 도를 닦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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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법관대표회의, 일산 사법연수원
19일 경기도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3000명 판사를 대표하여 100명의 판사가 참석한 가운데 전국법관대표회의가 개최됐다.

이번 회의는 판사들의 인사를 주무르는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사법개혁 움직임을 저지했다는 의혹에서 시작됐다. 올해 초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사법독립과 법관 인사 제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관련 학술행사를 준비하자, 법원행정처 차장이 행사 축소를 지시하는 등 외압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판사들이 이렇게 집단적인 행동을 취한 것은 지금까지 다섯 차례 정도 있었으며, '법원'과 '재판'이 외압을 거부하고 법관 인사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 회의는 최근 확산되고 있는 사법개혁 논의를 공론화해 사법부 내에서 자체적으로 사법개혁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판사의 청렴은 우리 사법체계의 마지막 보루이며 재판을 받게 되는 수많은 서민의 '승복' 문제와도 직결된다. 2004년 8월 17일 ‘청렴 법관’의 상징이었던 조무제 대법관은 퇴임식에서 후배 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해관계에 얽힌 주변으로부터 초연하려면 고독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법관은 고독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달갑지 않은 어둠 같지만 고독에 익숙해지면 미처 볼 수 없었던 은밀한 사물의 존재까지 알아보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보편성을 잃은 주장이라면 눈앞에 다가오는 여론이라 할지라도 그로부터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 법관은 깊이 있는 사색과 흔들리지 않는 자세와 보편적인 상식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엄정한 독립'과 '절대 고독'의 도를 닦아야 하는 판사들이지만, 현실적인 유혹들은 판사들을 결코 고독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느 순간 조직 논리를 앞세우는 권위적인 관료집단이 생기게 되고 청렴의 기준은 뒷순위로 밀리기 마련이다.

조 대법관이 수많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이 컷다고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바른 길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고, 남한테 절대 신세를 지지 않았으며 차비를 아끼기 위해 단 한 번도 차를 타고 다닌 적이 없는 분이었다.

법원 설립 이래 세 번째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 법관들은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상설화 필요성에 의견을 모았다. 대법원장에게 권한이 집중된 사법행정에 일선 판사들이 관여할 수 있는 '사법부 내 의회 역할' 기구를 만들겠다는 취지이다. '제왕적' 대법원장 및 법원행정처의 권한 축소에 대한 토론은 7월24일로 정한 2차 회의에서 계속하기로 했다.

이날 사법연수원 정문 앞에서는 민주적 사법개혁 실현을 위한 연석회의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전국법관대표회의 전 법관들에 요구한다'는 제목의 기자회견을 열고 사법부 개혁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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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실천연대•구국실천국민연합 부정부패척결•적폐청산 국민대회에 처하여
【구국실천국민연합】6/24 제2회 부정부패 척결 3,000명 대회 및 구국비상국민총연합대책위원회 결성키로
【5/2도인대회】구국실천국민연합, "숨은 인재 발굴하여 올바른 대통령 세우자"
【강연회】종교개혁 500주년과 기독교의 미래
【2017정유년 합동구국국운발표대회】정권 수립 70주년 맞는 북한 붕괴! 2020년 완전 통일!!
【대한민국 주권 찾기】누가 민족의 죄를 회개하는 의인이냐?
【운명공동체】머리 둘 달린 뱀
【명예로운 시민시대】기적의 메시아는 다시 오지 않는다
ラベル:사법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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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年06月18日

【주한일본인의모임】 '나눔의 집' 방문, 봉사활동

日本語
'주한일본인모임' 회원들이 6월 17일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나눔의 집'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실시했다. 일본인 여성들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나눠드리고 노래와 춤으로 위로했다.

16세 때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李容洙) 할머니가 납치되어 보내진 곳은 대만의 신죽(新竹)라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대만까지는 배로 이송되었는데, 그 배 안에 할머니와 같은 5명의 소녀들이 타고 있었다. 제일 연장자는 18세였다.

마침내 대만에 도착한 할머니가 끌려간 곳은 특공대의 출격 기지였다. 그들은 오키나와 주변에 있던 미국 함대를 폭격하기 위해 끊임 없이 출격했지만, 대부분 미리 잠복해 있던 미군의 요격기에 격추당해 함대까지는 아예 접근도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성공확률 0에 가까운 작전이었던 것이다.

어느날 한 병사가 "비행기로 특공 작전하러 간다. 두 명이 타고 간다. 나는 21살이다. 며칠 지나면 죽으러 갈 것이다"고 말을 꺼냈다. 할머니가 "나도 데려가요"라고 애원하자, "안돼" 하면서 노래 하나를 가르쳐주었다. 할머니는 지금도 그 노래를 일본어로 곧잘 부른다."

"간코(艦攻=艦上攻撃機) 이륙하네 대만을 떠나네 금빛 은빛으로 파도치는 구름을 헤치고 배웅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울어주는 사람은 도시코(이용수)뿐이라네.

간코 이륙하네 신죽을 떠나네 금빛 은빛으로 파도치는 구름을 헤치고 배웅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울어주는 사람은 이 아이(이용수)뿐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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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언하는 이용수 할머니(왼쪽열 중앙)
결국 그 병사와 할머니는 이틀 동안 같이 지내게 됐다. 그리고 병사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세면도구를 챙겨주면서 이렇게 다짐했다. "도시코 숨어 있어라.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 되어 너를 엄마 곁으로 데려다 줄게. 엄마 가슴에 안겨줄테니 도시코 죽지마. 그러니 꼭 숨어 있어라."

이 말을 남기고 떠난 그를 할머니는 눈물로 배웅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잠시 후, 할머니가 있던 기지가 공습을 당해 숙소에 폭탄이 떨어졌다. 할머니는 지하 방공호에 몸을 피했기에 무사했지만, 그녀를 숨겨준 여성은 사망했다.

어느날 중국인이라는 남자가 찾아와 "전쟁은 끝났다. 더이상 이런 곳에 머물면 안돼"라며 할머니들을 수용소로 데려갔다. 그후 할머니들은 모두 해방되어 다시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고 한다.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역사적 진상 규명과 진정성 있는 사죄"라며 "도쿄 한복판에 소녀상을 세워 자신들의 조상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을 후세 사람들이 보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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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앞열 중앙)와 함께
그런데 일본인의 "마음으로부터의 반성과 진정성 있는 사과를 기대하며" 세워진 소녀상이 오히려 재일동포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어, 금후 문재인 정부가 풀어야 할 난제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한일관계의 악화에 따른 가장 큰 피해자는 우리 재일동포"라며 2015년 대국민호소문을 다음과 같이 전면 광고한 바 있다.

1.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같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희생자이면서 일본에서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재일동포들이지만, 외교 교섭에 있어서 일방적인 승리는 있을 수 없는 만큼 지난 24년간 양국간 현안이었던 이 문제를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합의를 이룩한 본국 정부의 고충을 이해하고 이를 지지한다.

2. 금번 합의가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과거 어느 정부도 하지 못했던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등 결과를 이끌어낸 만큼, 합의에 대한 내부 분열로 영원히 미제(未濟)로 남기기보다는 금후 일본의 약속이행 여부를 지켜보면서 대승적 견지에서 합의안 수용을 본국 국민들에게 호소한다.

3. 일본 정부는 양국 간 합의사항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행하여 고령의 피해자들이 하루라도 빨리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고 과거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것과 아울러 이 비참한 역사를 후세대까지 잊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

4. 지난 수년간 어려웠던 한일관계로 인해 재일동포의 생계가 큰 타격을 받고 생활의 터전인 동경 신오쿠보 거리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서 혐한(嫌韓) 시위가 넘쳐났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금번 합의로 더 이상 양국관계가 경색되지 않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발전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5. 우리 60만 재일동포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뼈에 사무치게 겪어온 당사자들로서 양국 간 가교로서 역할을 충실히 이해하며 모국의 발전을 통한 진정한 극일(克日)의 날이 오기를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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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함께
【재한일본인모임】위안부 문제를 발본색원할 궁극적 해결책은 무엇인가?
【서울숲 프랜드마켓】라일락 향기 가득한 5월, 다시 피우는 한일 우정의 꽃
【참 평화의 길 Ⅲ】역지사지(易地思之)
【남북분단과 통일】70년 포로 및 귀환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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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韓日本人の集い】「ナヌム(分け合い)の家」訪問、奉仕活動

한국어
「在韓日本人の集い」のメンバーらが、6月17日、京畿道広州市にある「ナヌム(分け合い)の家」を訪問し奉仕活動を行った。日本人女性たちは、慰安婦被害者ハルモニの為に準備したプレゼントを渡し、歌と踊りで慰めた。

16歳のときに拉致された韓国人慰安婦被害者のイ•ヨンス(李容洙)ハルモニが連れて行かれたところは、台湾の新竹だったという。

台湾には船で移送されたが、同じ船にハルモニを合わせて5人の少女たちが乗っていた。一番年上は18歳だった。

やがて台湾に着いたハルモニが連れていかれたのは特攻隊の出撃基地だった。彼らは、沖縄周辺にいたアメリカ艦隊を攻撃するために次々と特攻機が出撃したが、そのほとんどは既に上空で待ち伏せしていたアメリカ軍の迎撃機に落とされ、艦隊にたどり着くことすらできなかった。元々成功率ゼロの作戦に過ぎなかった。

ある兵士は、「飛行機で特攻に行く。二人で乗っていく。僕は21歳だ。何日かすると僕は死にに行く」と言った。ハルモニが「私も連れて行って」と哀願すると「ダメだ」と言いながら、こんな歌を教えてくれた。ハルモニは今もそれを日本語で朗々とうたうことができる。

「カンコウ(艦攻=艦上攻撃機)離陸よ 台湾離れ 金波銀波の雲乗り越えて 誰だって見送る人さえなけりゃ 泣いてくれるは としこ(イ•ヨンス)が一人だ」

「カンコウ離陸よ 新竹離れ 金波銀波の雲乗り越えて 誰だって見送る人さえなけりゃ 泣いてくれるは この子(イ•ヨンス)が一人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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証言するイ•ヨンス(李容洙)ハルモニ(左列中央)
結局、その兵士とハルモニは二日間、一緒に過ごすことになった。最後に、兵士は自分の洗面道具を渡してこう約束した。「としこ、隠れていろ。僕が死んだら僕が神様になってお前をお母さんの元へ連れて行ってあげる。お母さんの胸に託してやるから、としこ、死なないで。どうか人に見つからないで。」

そう言い残して去っていった彼をハルモニは泣きながら見送った。

そんなことがあってから暫くして、ハルモニのいた基地は空襲を受け、ハルモニたちの建物にも爆弾が落ちた。ハルモニは地下の防空壕にいて無事だったが、彼女をかくまってくれた女性は死んでしまった。

その後のある日、中国人を名乗る男性がやってきて、「戦争は終った。もうこんなところにいてはいけない」と語り、ハルモニたちを収容所に連れて行った。その後、ハルモニたちはようやく解放され、朝鮮の故郷へと連れ返されたという。 

イ・ヨンスハルモニは、「慰安婦被害者が望むのはカネではなく歴史的な真相究明と心からの謝罪だ」と訴えながら、「東京のど真ん中に少女像を建て、自分たちの先祖が私たちに行った蛮行を後世の人たちが見て記憶できるようにすべきだ」と述べたり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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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安婦被害者ハルモニ(前列中央)と一緒に
しかし、日本人に「心からの反省や真の謝罪をさせるために」建てられた少女像が、逆に在日韓国人に新たなる苦痛を与える結果を招いており、これは今後文在寅政府が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い難題として残った。在日本大韓民国民団は、「日韓関係悪化による一番の被害者は我々在日同胞だ」と訴え、2015年、次のように国民向け談話を全面広告したことがある。

1.慰安婦被害者ハルモニたちのように日帝の植民地統治の犠牲者であり、日本で定着するしかなかった私たち在日同胞だが、外交交渉において一方的な勝利はありえない。過去24年間両国間の懸案だったこの問題を、様々な困難にもかかわらず、最善の合意を成し遂げた本国政府の苦しい胸の内を理解し、これを支持する。

2.今回の合意が被害者達の立場としては満足できるほどの水準でないとしても、過去どの政府もできなかった日本政府の責任認定など、結果を導き出した。合意に対する内部分裂で永遠に未解決で残すよりも今後日本が約束履行をするかどうか見守りながら、大局的見地から合意案を受け入れるよう本国の国民に訴える。

3.日本政府は両国間合意内容を迅速かつ正確に履行し、高齢の被害者たちが一日も早く名誉と尊厳を回復し、過去の傷を少しでも治癒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積極努力することとあわせて、この悲惨な歴史を後の世代まで忘れないよう適切な措置を行うよう訴える。

4.過去数年間、厳しかった韓日関係によって在日同胞の生計が大きな打撃を受け、生活の基盤である東京・新大久保の街をはじめ日本各地で嫌韓デモがあふれた事実を想起しながら、今回の合意でこれ以上両国関係が梗塞せず、未来志向的な関係に発展していくよう期待する。

5.私たち60万在日同胞は国を失った悲しみを骨身にしみて味わった当事者として、両国間の懸け橋として役割を忠実に履行し、母国の発展を通じた真の克日の日が来ることを熱望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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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くなったハルモニたちと一緒に
【在韓日本人の集い】慰安婦問題を抜本的に解決する究極の解決策はあるのか?
【真の平和の道Ⅲ】易地思之(相手の立場に立って考える)
【南北分断と統一】70年捕虜及び帰還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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