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年06月07日

【재한일본인모임】위안부 문제를 발본색원할 궁극적 해결책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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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뉴스 김금산 대표 초청강연(6/6 파주성전)
日本語
1. 일본군과 위안부

1918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 7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이 성병에 걸려 전멸했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1931년 9월 만주사변 당시 군인 전용 공창가(公娼街)가 생긴 후로 일본군이 가는 곳곳마다 위안소가 설치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위안부의 수요가 증가해 위안부 모집이 조선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위안부 모집은 광고 등을 통한 공개 모집이었으며, 이때까지는 조선 처녀에게 강제성을 띠지 않았다.

그후 신문이나 언론을 통한 광고 뿐만 아니라 납치, 인신매매, 직업 알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위안부를 모집했으며, 그 중 일부는 여성 근로자를 선발한다고 허위 광고를 내기도 했다. (미국 의회조사국(CRS) 보고서)

소개업자 뿐만 아니라 동네 반장과 경찰 등 행정조직을 이용한 동원도 늘어났다. 위안부 모집업자들은 먼저 마을 이장과 순사들을 매수해 협조를 구했다. 마을 이장이 투전판에서 돈을 많이 잃어 빚이 많은 사람을 알선하면, 모집업자가 돈을 주고 딸을 팔아달라고 권유하고 그 옆에서 일본 순사가 압력을 넣는 식이었다. (유곽의 역사, 2012)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으로까지 일본군의 전선이 확대되자, 마침내 일본군은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관동군(關東軍)이 24만 명에서 75만 명으로 증원되고 조선 처녀 1만 명이 관동군 쪽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불충신민, 2004) 대만 총독부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위안부가 강제로 차출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운동가가 위안부 모집에 앞장서기도 했다. 수카르노는 일본군의 점령이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여기고 일본군에 대한 협력과 일본군을 상대로 하는 인도네시아인 위안부 모집에도 앞장섰다. (천 가지 얼굴의 이슬람 그리고 나의 이슬람, 20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에 대한 수요를 다 채울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만들어 만 12세~40세의 독신녀를 정신대의 대상자로 규정했다. 이렇게 차출된 정신대에서 위안부가 충당되기도 했다. 본래 '정신대'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근로자이며 '위안부'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불충신민, 2004)

일본군이 정복한 동남아시아에서 위안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1942년 일본인 주선인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많은 돈, 가족의 부채를 없앨 기회, 쉬운 일' 등을 조건으로, 가난한 집안의 소녀들을 상대로 일본 등 공장 근로자로 알선한다고 속여 선금을 주고 데려갔다. (한국민족운동사론, 2008)

경성부 방산초등학교에서는 도덕 점수가 뛰어난 12살 여학생을 선발해 도쿄를 구경시켜 준다고 속여 6명을 정신대로 보냈고, 소학교 정신대 모집을 학교별로 배정하여 100명을 차출해 서울역에서 보냈다고 한다. 어린 여학생들에게 정신대에 가면 배고픈 일도 없고, 1주일에 한 번씩 영화를 볼 수 있고, 학교도 다닐 수도 있으며, 군수공장 같은 데서 일하면 돈도 벌 수 있다고 속여 데려갔다.(한누리미디어, 2004)

2. 위안부 문제와 한일관계

1993년 8월 일본 고노 관방장관은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으나 그 경우도 감언, 강압에 의거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들도 많았으며, 관헌이 직접 이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1995년 일본 시민단체들이 국민기금을 모아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속죄금을 지급하는 아시아여성기금을 발족했으나, 한국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분명치 않다며 수령을 거부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위안부 관련 민간단체들이 일본 정부에게 법적 배상을 요구하면서 한국 외교부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위안부 피해자인 양금모씨는 한일기본조약 배상금으로 성장한 포스코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한편 위안부 피해자인 심미자(2008년 사망) 씨 등은 "우리는 돈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명예다. 우리를 이용하여 국제적인 모금 활동을 하는 것은 우리를 두 번 모욕주는 행위"라고 비판하고, 2004년 기독교계 정대협과 불교계(조계종) ‘나눔의 집’을 상대로 '모금행위 및 시위동원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그리고 "우리 정부와 시민단체 등이 툭하면 위안부 할머니들을 내세워 일본을 비판하고 일본에게 배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정작 정부와 시민단체 등이 위안부 할머니에게 해준 일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건강과 소송문제, 또 장례식 등까지 세세한 부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보살핌을 펴왔다"고 밝혔다.

2005년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입장을 밝히고, 2011년 헌재는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함으로써 한일외교의 쟁점으로 부상했다.

2015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해,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고 합의했으나,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재교섭의 의향을 피력함으로써 또다시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3. 자각과 반성ㅡ한일 양국의 공동책임

2001년 한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 모집업자에 의해 동원된 위안부는 16%인데 비해, 한국인 모집업자에 의해 동원된 여성은 29.4%였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이 직접 동원한 경우에도 반드시 조선인들의 협조가 있었다고 한다. (민족과 페미니즘, 2003)

당시 위안부 모집에 앞장섰던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기독교인이었으며, 많은 기독교 교단들은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지지하고 위안부 모집과 전쟁물자 조달에 협조했다. (동아시아와 근대의 폭력1, 2001)

1938년 6월 이화여대의 김활란, 동아일보의 김성수, 조선일보의 방응모 등이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그 회원수가 무려 3만여 명에 달했다. 장면 전 총리가 간사를 맡고,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모윤숙, 김동환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그들은 1939년 국민징용령이 공포되자 조선인을 일본의 탄광과 공장으로 보내는데 앞장섰으며, 자원입대와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도 열을 올렸다.

1938년 9월 9일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1943년 한국 기독교가 일본 기독교에 편입됨으로써 신앙의 주체성과 정절을 모두 잃고 말았다. 기독교 교단들은 위안부 모집과 전쟁물자 조달에 협조했으며(기독교 신학, 김균진), 청년들은 전쟁터로, 소녀들은 위안부로, 장년들은 탄광과 공장으로 끌려갔다.

이처럼 국가 공권력이 없어진 상황에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순진한 일반 백성들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행동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시 국가를 이끌었던 지도층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야 한다.

따라서 위안부의 진상을 규명하고 일본 정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동조한 조선인들의 책임도 똑같이 물어야 한다. 최근 양심선언하는 일본인들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비해, 강제동원과 인신매매를 주도하여 여성들의 인권을 짓밟은 한국인들은 한 명도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거나 처벌받지도 않았다. 

먼저 우리 스스로 지난날의 문제를 자각하고 근본적으로 반성할 때 비로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4. 원수에서 형제자매로ㅡ여성자매결연

통일교회 문선명 총재는 30만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세계평화여성연합(총재 한학자) 주최로 국제적인 여성자매결연을 추진한 바 있다. '한일 여성 32만 자매결연'을 비롯해, 일본-한국,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한국-대만, 한국-태국 등의 여성자매결연이 맺어졌다.

여성자매결연은 그 취지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여성들이 '남성들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간의 증오와 갈등을 극복하고, '원수가 아닌 형제자매로서' 과거를 청산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는 취지였다. 그런 뜻에서 '6일째 창조된 인간과 6천년 인류역사를 되찾기 위해' 6년에 걸쳐 국제 자매결연이 추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문선명 총재는 한국 기독교를 대신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위안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일본의 과오를 청산하기 위해 한국땅을 찾아온 일본 대표 16만명 여성지도자들은 한국 여성지도자 16만명과 함께 '남북통일과 아시아•세계평화를 위해 목숨을 다 바쳐 사생결단할 것'을 '하늘 앞에 서약'했다. 16세 소녀 유관순의 화신체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결론적으로 여성자매결연은 소극적•과거지향적이 아닌 적극적•미래지향적인 대안이며, 일시적이 아닌 항구적인 해법으로서, 위안부 문제의 근본을 파헤쳐 발본색원한 궁극적인 해결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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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만명 일본 여성지도자 교육(위) 한일여성자매결연(아래)
【참 평화의 길 Ⅲ】역지사지(易地思之)
【남북분단과 통일】70년 포로 및 귀환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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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年06月06日

【석일징 칼럼】해양섭리의 전진기지 규슈 가고시마(鹿児島)를 다녀와서

몇 년전 '화랑과 사무라이'라는 글을 쓰고 있을 때, 일본학자 미시나 아키히데(彰英 論文)가 쓴 '신라 화랑의 연구'라는 책 속에서 가고시마에 신라 화랑의 미소년으로 치장하는 풍속이 에도시대까지 남아 있었다는 글을 접한 적이 있다.

왜 규슈 남단에 신라의 풍습이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가야 김수로왕의 왕자들이 가고시마 쪽으로 이주했다는 글을 읽고 모든 의문이 풀렸다.

가고시마의 한국산(韓国岳 :가라쿠니다케)이라는 산 이름이 말해주듯 이곳은 오래전부터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왔던 고니시 유끼나가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그가 사로잡은 한 양반집 규수를 수양딸로 삼아 그녀도 천주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세끼가하라(関ヶ原)전투에서 패한 고니시가 죽자 그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는데, 천주교를 포기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가고시마 앞바다의 외딴섬에 유배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고결한 생을 마쳤다. 최근 바티칸으로부터 복자로 서품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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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쯔마야끼 초기작품 '히바카리(火計=불만 일본 것)'
한편,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쳐들어온 사쓰마(薩摩, 가고시마현의 옛 이름)의 번주는 많은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 가면서 용의주도하게 고령토까지 가져갔다. 이들이 만든 초기 사쓰마야끼(薩摩焼, 도자기)는 기품 있는 이조백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또한 도자기 이름인 '히바카리(火ばかり=오직 불만)'는 흙과 유약과 도공 등 모든 것이 조선에서 온 것으로 만들어졌고, '불'만 일본의 것을 사용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규슈의 가라쓰야키(唐津燒), 아리타야키(有田燒), 이마리야키(伊万里燒), 사쓰마야키(薩摩燒) 등 도자기산업이 정착될 무렵, 명나라가 망하고 경덕진(景德鎭)을 비롯한 도요지가 초토화되어 수출길이 꽉 막히자, 무역선들이 규슈로 줄줄이 몰려들기 시작해 가고시마는 도자기 수출로 일약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렇게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무력의 힘을 키워 죠슈번(長州藩)과 사쬬(薩長)동맹을 맺고, 막부을 타도하여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주역이 바로 김해김씨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사이고 다까모리(西郷隆盛)이다.

사이고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켰으며 일본은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하여 곧 한국을 병합한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끝내 조선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이 납치해온 조선 도공들이 일으킨 도자기 산업으로 부강해져 역으로 한국을 병합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Collage 2017-06-06 18_20_52.jpg사이고 다까모리(왼쪽)가 주군이자 스승이자 아버지로 모시던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를 모신 신사
우리나라는 최첨단 도자기 기술을 갖고도 제대로 활용할 줄 몰라 부국강병도 이루지 못한 채, 남 좋은 일만시키고 그들에게 나라까지 뺏앗겼으니, 지도자들의 혜안과 실사구시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뼈져리게 느꼈다.

불과 물의 도시 가고시마는 해양산업이 왕성한 고장이다. 인류의 미래에 펼쳐질 해양섭리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해양대국 일본과의 협력이 절실하며, 특히 오키나와 군도의 시발점인 가고시마가 바로 태평양시대를 여는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불현듯 스쳐지나간다.

앞으로 해양섭리를 위해 청소년들이 물과 친숙해지도록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수영과 노젓기 등을 어릴 때부터 익히도록 해야 한다. 내달 7월에 계획 중인 거문도 성지 방문, 박정진 시집 '거문도' 출판기념회 및 시낭송회, 위령제 등은 해양섭리를 위해 뜻 깊은 행사가 될 것이다.

가고시마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앞으로 한국과 더 끈끈한 인연을 맺으면서 해양섭리의 전진기지로서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가고시마! 또 가고십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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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 앞바다의 해양산업
【석씨(昔氏)】일본에서 300년간 군림한 석탈해 후손 소가씨(蘇我氏)
【재일동포 미래창조포럼】유흥수(柳興洙) 주일대사 "한국과 일본은 일란성 쌍둥이"
【한일음악실크로드】3박자 리듬의 아리랑과 후루사토(故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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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成皇后】懺悔と和解の象徴として建てられた福岡·節信院の「子安観音像」

PicsArt_06-04-05.13.51.jpg6月3日、節信院を訪問した大韓皇室文化院·李源(イ·ウォン)総裁と洪陵奉香会訪日団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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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岡市内の小さなお寺、節信院の正門そばに温和な微笑の石像が建っている。驚くことに、この石像は日帝によって残酷に亡くなった明成皇后(閔妃)を哀悼する観音菩薩像である。

この石像は、明成皇后暗殺13年後の1908年に建てられたが、製作者は他でもない、皇后に直接刀を振り回した浪人の1人、藤勝顯である。当時、彼は右翼民族主義団体の玄洋社のメンバーだった。

玄洋社は、日本の極右団体の始祖である頭山満が明治維新後没落した武士階級出身者を集めて福岡で結成した組織であり、戦後マッカーサー軍政によって解散されたが、それ以降、歴代首相たちが彼らにアドバイスを求めるほど大きな影響力を持った政治団体であった。

明成皇后暗殺に日本政府が直接介入したという証拠を隠蔽するために、私組織である玄洋社出身の朝鮮公使·三浦梧楼を立てて、彼を通じて浪人たちを動員したと知られている。

一説によれば藤勝顕の第二刀が王妃を絶命させたと言われているが、これについては断定するに足る証拠はまだ得られていない。しかし、藤勝顕が閔妃暗殺に関わった1人であることは間違いない。

事件発生から13年後、藤勝顕は反犯行に使われた自分の刀をお婆さんが通っていた節信院に奉納しようとしたという。しかし、暗殺に使われたとされる刀は穢れたもので、仏教では受け入れられない、そういう禁則から、櫛田神社に納められたとされる。

そして、子安観音菩薩像は、製作を依頼したのは藤勝顕で、「皇后が亡くなる時の顔が度々浮かんで、心がやすらげない。どうしてもお供養したい」といわれるが、藤勝顕の妻の母親が夫の行為に驚き、供養を申し出たといわれる説もある。「国士と朝鮮王宮に乗り込み、何の罪もない人を斬り、王妃を殺した事は、私情に於いて忍べず」と怒りを表したという。

当初、巨額を投じて製作した青銅像は太平洋戦争末期に軍需物資として徴発され無くなってしまう悲運に見舞われた。さらに、45年に米軍の福岡大空襲で節信院自体も消滅の危機に瀕した。

観音像が再び蘇ったのは、大空襲の翌日、観音像のあった場所に捨てられている女の子を、ある篤志家夫婦が発見したのがそのきっかけだった。夫婦は、同情と憐憫の情を抑えきれず赤ちゃんを連れて行って、我が娘の如く大事に育てたが、運命の悪戯なのか、19歳という若さで無念にも亡くなってしまった。

ああ!子を失った親の心情を何に比べることができようか!深い悲しみに陥った夫婦は、娘の冥福をお祈りし供養する仏像を建てることにした。その後、娘が初めて発見された場所に元々観音像があったという話を聞き、観音像の形状と娘を形象化した赤ちゃん像を石像に再現して献呈することに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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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岡·節信院、子安観音像
このように、左手に女の子を抱え、右手に蓮の花を持ち、柔らかな微笑みを浮かべながら座っている「子安観音像」は、明成皇后の人生の如く切ない紆余曲折を辿った。

今日、明成皇后暗殺物語が日本に知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去る88年、日本の著名な伝記作家である角田房子氏が「閔妃暗殺」という本を出版し、大きな反響を巻き起こしたことがそのきっかけだった。

角田さんは「韓国では誰でも知っている事件を加害者側の日本ではそんな事件があったことさえ一般的には知られていないㅡㅡという事実に私はひどく驚いた。「日韓親善」「相互理解」などという言葉が、むなしいものに感じられた」と心境を明かした。

また、「昔の事件だが、韓国人にとっての「忠臣蔵」であり、国民感情に影響を与えている点で、私はこれを「今日の問題」として考えるようになった」と、極端な歴史認識の違いこそ日韓両国を近くて遠い国にしてしまう原因の一つであると指摘した。

節信院の加藤昌弘住職は、「閔妃は、当時の国際情勢の中で、無念にも犠牲になった」と残念がりながら、今日、明成皇后を象徴化した観音菩薩像は、この地域で罪を繰り返すことはできないとして、懺悔と和解の象徴として受け入れられていると語る。

ところが、偶然なのか必然なのか。明成皇后暗殺の背後勢力であった玄洋社の頭山満は、彼が深く尊敬した加藤司書(住職の祖父)が眠っている節信院によくお参りに来て、墓前の石に正座して参拝したという。

DSC_1089.JPG色紙に「節信院を訪問して祈りましょう」と書いて節信院の加藤さんに友情を伝える李源総裁(中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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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참회와 화해의 상징으로 세워진 후쿠오카 셋신원(節信院)의 자안(子安)관음상

PicsArt_06-04-05.13.51.jpg6월 3일, 셋신원을 방문한 대한황실문화원 이원 총재와 홍릉봉향회 방일단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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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시내의 작은 사찰 셋신원(節信院)의 정문 옆에 온화한 미소를 띤 석상이 하나 서 있다. 놀랍게도 이 석상은 일제에 의해 잔인하게 죽은 명성황후를 애도하는 관음보살상이다.

이 석상은 명성황후 암살 13년 후인 1908년에 세워진 것으로, 제작자는 다름 아닌 황후에게 직접 칼을 휘두른 '도 가츠아키(藤勝顕)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는 일본 우익 민족주의 단체인 겐요샤(玄洋社) 소속 멤버였다.

겐요샤는 일본 극우단체의 시조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満)가 메이지유신으로 몰락한 무사계급 출신들을 모아 후쿠오카에서 조직한 것으로, 전후 맥아더 군정에 의해 해산됐으나 이후로도 일본 총리들이 그들의 조언을 구할 정도로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일본 정부가 직접 개입한 정황을 은폐하기 위해 사조직인 겐요샤 출신의 미우라 고로 조선 공사를 앞세워 그를 통해 낭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도 가츠아키가 휘두른 두 번째 칼이 왕비를 절명시킨 것이라고 하나, 아직 그 사실을 단정할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도 가츠아키가 명성황후 암살에 직접 관여한 것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건이 발생한지 13년이 지난 뒤, 도 가츠아키는 범행에 사용된 자신의 일본도를 할머니가 평소 다니던 셋신원에 보관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암살에 사용되어 더러워진 칼을 불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금칙 조항 때문에 구시다(櫛田)신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가 숨질 때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꼭 공양하고 싶다"며 도 가츠아키가 명성황후를 위해 관음보살상의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편으로는 황후를 살해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장모가 공양을 제안했다는 설이 있다. "무사들과 함께 조선 왕궁에 쳐들어가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베고 왕비를 죽인 것은 인정상 도저히 견딜수 없는 일"이라고 노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초 거액을 들여 제작된 청동관음상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군수물자로 징발돼 녹아 없어지는 비운을 겪게 된다. 게다가 45년 미군의 후쿠오카 대공습으로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셋신원마져 사라질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이 관음상이 다시 빛을 보게된 것은 대공습 다음날 어느 독지가 부부가 관음상이 있던 자리에 홀로 버려져 있는 여아를 발견한 것이 그 계기였다. 부부는 너무 안쓰러워 여아를 데려다가 친딸처럼 애지중지 키웠는데, 운명의 장난이런가 그마저 19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호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으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던 부부는 딸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불상을 세우기로 했다. 셋신원에 불상을 기부하려다 딸을 처음 발견했던 그곳에 본래 관음상이 있었다는 사연을 듣고, 관음상의 형상과 딸을 형상화한 아기상을 석상으로 재현해 봉헌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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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셋신원(節信院) 자안(子安)관음상
이처럼 한 손엔 여자 아이를 안고 또 한 손엔 연꽂을 들고 자비로운 미소를 띤 채 앉아 있는 자태의 '자안(子安)관음상'은 명성황후의 삶 만큼이나 애절한 곡절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본에 알려지게된 계기는 지난 88년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인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씨가 '민비 암살'이라는 책을 펴내 큰 반향을 일으킨데서 비롯된다.

쓰노다 씨는 “한국에서는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건을 가해자측인 일본에서는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적지않게 놀랐다"며 한일친선, 상호이해 등의 단어가 공허하게 느껴졌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또한 "오래전 사건이지만 한국판 '추신구라(忠臣蔵, 47인 사무라이의 복수극)'이며, 한국의 국민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것을 '오늘의 문제'로 생각하게 됐다"며, 극단적인 역사인식의 차이야말로 한일 양국을 가깝고도 먼 나라로 만드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가토 마사히로(加藤昌弘) 셋신원 주지는 "민비는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됐다"고 안타까워 하며, 명성황후를 상징화한 이 관음보살상은 이 지역에서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할 수 없다는 참회와 화해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였던 겐요샤의 도야마 미쓰루는 그가 평소 존경했던 가토 시쇼(加藤司書, 주지의 조부)가 잠들어 있는 셋신원에 자주 들러 그의 묘비 앞 석단 위에서 무릎을 꿇고 참배했다고 한다.

DSC_1089.JPG"절신원에 방문하여 기도합시다"라며 셋신원 가토 씨에게 우정을 전달한 황사손 이원 총재(중앙)
【한일교류】홍릉봉향회·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구마모토 한일심포지엄 개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특집2】김옥균과 후쿠자와 유키치
【한일교류】朴赫居世와 伊勢神宮
【한일교류】평화를 사랑하는 유네스코 "사람들 마음에 평화를 심자"
【한일교류】헤이트 스피치 対 러브 스피치
【한일교류】조선의 은인들:일본인 독립운동가
【한일교류】일본의 고대사 컴플렉스와 한국의 근대사 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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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年06月04日

【不ニ之塔】熊本·正法寺の赤星善広師、強制労働犠牲者供養塔建立「本来は一つ。二つにあらず」

DSC_1072.JPG6月3日、不二之塔·中国人殉難者慰霊之碑前、正法寺·赤星善生住職(後列右から4人目)、大韓皇室文化院·李源(イ·ウォン)総裁(後列中央)及び洪陵奉香会訪日団一行。
한국어
熊本県荒尾市にある「正法寺」の境内には2つの石碑が建っており、一つは「中国人殉難者慰霊之碑」、もう一つは「不二之塔」と書かれている朝鮮人殉難者慰霊碑である。1972年、この寺の住職であった赤星善弘名誉住職が、三池炭鉱に強制連行され亡くなった中国人·朝鮮人労働者を慰霊するため建立したものである。

熊本県には「月が出た 出た 三池炭鉱の上に出た」の「炭坑節」で知られる「三井三池炭鉱」があった。開戦後、国内の炭鉱は「明日の10トンより今日の1トン」を合言葉に増産を強いられ、その中心となったのが三池炭鉱だ。農民、学徒、米英豪の連合軍捕虜はもとより、朝鮮半島や台湾からもほとんど強制的に労働力をかき集めた。

同炭鉱に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は5000人余り。福岡県大牟田市と熊本県荒尾市の19カ所に収容所があり、作業中の事故や、酷使虐待による朝鮮人·中国人死亡者は約700人にのぼる。このすさまじい死亡率の高さから分かるように、彼らは単なる消耗品に過ぎ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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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中国人が強制労働を強いられた九州地域炭鉱位置
赤星善弘師は、13歳で仏門に入り高野山で修行、空海弘法大師の教えを学んだ。「大師は中国に渡り密教を伝授した。もし大師が現世の方であるならば、中国、朝鮮人の犠牲者供養をしないわけがない。これは私に課せられた一つの使命だ」と自ら悟った。

供養塔の建立費用は、托鉢で集めることにした。人々の供養の気持ちを集めることが大切だと考えたからだ。趣旨書を持って僧侶らと県下を回り広く県民に歴史の事実を訴えた。しかし、歴史の事実を訴えることは三井鉱山の古傷を暴くことでもある。托鉢の道中、笠に石を投げつけられ穴があくなどの嫌がらせや妨害脅迫も受けた。右翼から「貴様は共産党か」「三井鉱山の古傷を暴くようなことをするな」などと攻撃された。

このように、3年余りかかって35万円が集まった。1972年4月、中国人殉難者供養塔の除幕式が行われ、それから5ヶ月余、田中角栄首相が訪中し、日中共同声明を発して国交を正常化させた。今度は「赤星さんは、先見の明があった」と誉められた。上野動物園にパンダが贈られるなど、日本でにわかに中国ブームが起き始め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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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之塔(左)·中国人殉難者慰霊之碑(右)
一方、朝鮮人犠牲者の碑名はなかなかまとまらなかった。朝総連は「朝鮮人殉難の碑」、民団は「韓国人殉難の碑」。しかも、同席して話し合うことをしなかったので、仕方なくそれぞれの事務所を15回ずつ訪ねたが、それでも平行線。どちらも妥協しようとしなかった。

仏教用語で「不二」という言葉があり、「本来は一つ。二つにあらず」という意味である。結局、「不二之塔」と決めて、双方に納得してもらった。碑の名称をめぐって民団と総連の間で対立したため、「やがては平和的に統一されるであろうことを信じて」そのように名付けた。南北朝鮮が早く一つになってほしいとの願いが込められている。

同年10月、「不二之塔」除幕式には、朝総連、民団双方が参加した。ところが、翌年からの慰霊祭に韓国側が同席しなかった。1989年、ベルリンの壁が崩壊した直後、「東西ドイツも統一するじゃないか。あなた方も、一緒に供養してあげたらどうか。強制連行をされた時には、二つの国ではなかったでしょう?」と説得。双方が応じて、やっと、中国、南北朝鮮の合同慰霊祭が行えるようになった。以後、その伝統は続い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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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人南北朝鮮人殉難合同慰霊祭(2017/4/12)
赤星住職は、強制労働の中国人·朝鮮人を供養するだけでなく、毎年10月に、韓国·ソウルを訪れ、日本統治時代に政治犯が収容された西大門刑務所跡で法要を行う。また、南京や西安など中国各地、ミャンマー、フィリピン、ポーランドのアウシュビッツやイスラエルの嘆きの壁なども訪問し、宗教や国境を超えて、戦争犠牲者たちを弔ってきた。

住職は、「日本は戦時中の負の歴史にはできるだけ触れず、日本の近代化を牽引した、輝かしい歴史のみを伝えていきたがる。しかし、加害者が絶対に忘れてはならないのは、懺悔する心である。そしてお許しをえて、初めて「真の友好親善」が生まれる。懺悔の気持ちを形にするために、供養塔を建てた」という。

「三井三池炭鉱」の世界遺産登録を巡る葛藤については、世界遺産の登録は、世界遺産保護条約に基づき、文化遺産や自然遺産を「人類全体のための世界の遺産」として保護し、後世に伝えていくためである。「日本のため」ではなく、「全人類」の財産とするからには、なおさら歴史の多面性を伝えるための工夫が必要だろうと強調する。

【日韓交流】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花のように、あるがまま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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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지탑(不二之塔)】구마모토 정법사 아카보시 스님, 강제노동 희생자 공양탑 건립 '근원은 하나, 둘이 아니다'

DSC_1072.JPG6월 3일, 불이지탑·중국인 순난자 위령탑 앞. 정법사 아카보시 요시오 주지(뒷열 오른쪽에서 4번째), 대한황실문화원 이원 총재(뒷열 중앙) 및 홍릉봉향회 방일단 일행과 함께.
日本語
구마모토현 아라오시(熊本県荒尾市)에 있는 정법사(正法寺) 경내에는 2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중국인 순난자 위령비'와 '불이지탑(不二之塔)'이라고 쓰여 있는 '조선인 순난자 위령비'이다. 1972년 이 절의 주지였던 아카보시 요시히로(赤星善弘) 명예주지가 미이케(三池)탄광으로 강제연행돼 사망한 조선인·중국인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구마모토현에는 '달이 떳다 떳다 미이케탄광 위에 떳다'라는 '탄광 민요'로 유명한 '미츠이미이케(三井三池)탄광'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개전 후 일본의 탄광이 '내일 10톤보다 오늘 1톤'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증산을 강요하자 미이케탄광이 그 중추 역할을 했다. 농민, 학생, 미·영·호주의 연합군 포로는 물론 한반도와 대만에서까지 거의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끌어모았다.

이 탄광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은 5000여명. 후쿠오카현 오무타시(福岡県大牟田市)와 구마모토현 아라오시의 19개소에 수용소가 있었으며, 작업 중 사고나 혹사 등으로 사망한 조선인·중국인 사망자수가 약 700명에 이른다. 이 사망률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단지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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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중국인이 강제노동으로 시달인 규슈지역 탄광 위치
아카보시 스님은 13세에 불가에 입문하여 고야산(高野山)에서 수행하면서 공해·홍법대사(空海·弘法大師)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대사께서는 중국으로 건너가 밀교를 전했다. 만일 지금 살아계신다면, 틀림없이 조선인·중국인 희생자 공양을 하실 것이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다"라고 스스로 깨달았다.

공양탑 건립 비용은 탁발로 모으기로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공양하는 마음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취지문를 들고 스님들과 함께 걸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호소했다. 그런데 역사의 진실을 호소한다는 것은 곧 미츠이광산의 과거를 들춰내는 것이기도 했다. 탁발 나갔다가 돌에 맞기도 하고 공갈 협박을 받기도 했다. 우익들에게 "너는 공산당이냐" "미츠이광산의 지난 상처를 들추지 말라"고 공격당했다.

이렇게 3년 남짓 걸려 35만엔을 모았다. 1972년 4월 중국인 순난자 공양탑 제막식이 열렸고, 그로부터 5개월 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총리가 방중, 중·일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국교가 정상화되자, 이번에는 "아카보시 씨는 선견지명이 있다"며 칭찬을 들었다. 도쿄 우에노(上野)동물원에 중국 팬더가 들어오는 등 일본에서 갑자기 중국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인 희생자탑의 비명은 좀처럼 결정되지 않았다. 조총련은 '조선인 순난자비', 민단은 '한국인 순난자비'. 게다가 한 자리에 모여 의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양측 사무실을 15번씩 방문했지만 여전히 평행선이었다. 어느쪽도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불교에 '불이(不二)'라는 말이 있는데, '근원은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결국 '불이지탑'이라 정하고 양측의 동의를 얻어냈다. 비의 명칭을 둘러싼 민단과 조총련의 갈등 때문에 "결국은 평화적으로 통일될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남북이 하루속히 하나가 되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다.

동년 10월 '불이지탑' 제막식 때는 조총련과 민단이 모두 참석했다. 그런데 이듬해 위령제 때부터 민단이 동석하지 않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직후, "동서독도 통일하지 않는가. 여러분도 같이 공양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제연행 때는 두 나라가 아니었잖습니까"라고 설득해 겨우 남·북·중 합동위령제가 실시됐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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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남북조선인 순난자 합동위령제(2017.4.12)
아카보시 스님은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공양 뿐만 아니라 매년 10월 서울을 방문해 일제시대의 정치범 수용소였던 서대문형무소에서 법회를 연다. 또한 난징과 서안 등 중국 각지와 미얀마, 필리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 등을 방문하여 종교와 국경을 초월해 전쟁 희생자들을 위로해 왔다.

스님은 "일본은 전쟁의 부(負)의 역사를 가급적 건드리지 않고 일본의 근대화를 성취한 위대한 역사만을 전하려 든다. 하지만 가해자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참회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나서 상대가 용서할 때 비로소 '진정한 우호친선'이 성립된다. 그런 참회의 마음을 담아 공양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미츠이미이케탄광'의 세계유산 등록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 "세계유산 등록이란 '세계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문화유산이나 자연유산을 '인류를 위한 세계유산'으로 보호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인류'의 재산으로 등록하는 것인 만큼, 더욱 역사의 다면성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일교류】다큐멘터리 영화 '꽃처럼,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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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年06月03日

【日韓交流】明成皇后を考える会·洪陵奉香会、熊本日韓シンポジウム開催

PicsArt_06-03-04.51.40.jpg한국어
6月2日、熊本県教育会館において「日韓の過去を直視しさらなる友好を」というスローガンのもと、日韓シンポジウムが開催された。このシンポジウムは、「明成皇后を考える会」が主催し、在日本大韓民国民団熊本·平和憲法を活かす熊本県民の会·熊本県退職教職員等連絡協議会が後援した。

日清戦争終結後、1895年10月8日、日本公使三浦梧楼の指揮で、日本軍守備隊や「大陸浪人」と呼ばれる民間人などが朝鮮の京福宮に乱入し、明成皇后(閔妃·高宗の后)を殺害するという前代未聞の事件(乙未事変)が起きた。当時、日本政府はこの事件が欧米に知られることをおそれ、犯人たちをいったん広島監獄に収監し、裁判で三浦梧楼以下48名は「証拠不十分で免訴」措置をとった。

このように、近代の韓国と日本の悲劇は乙未事変から本格的に始まった。安重根(アン·ジュング)が伊藤博文を暗殺した最大の理由も「明成皇后殺害の罪」だった。ところが、明成皇后刺殺事件の下手人48人のうち、21名は熊本出身の青年だった。壬辰倭乱(文禄·慶長の役)で先鋒となった加藤清正の本拠地でもある。

「明成皇后を考える会」は、2004年に熊本県の教師30人余を中心に設立され、翌年同会の会員たちが明成皇后殺人犯の子孫らと一緒に明成皇后陵の前で謝罪の礼を奉げて以来、毎年明成皇后忌辰祭のために韓国を訪れ参拝している。
PicsArt_06-03-07.21.28-2.jpg明成皇后を考える会·古澤千代勝会長(左)、高宗皇帝·明成皇后の祭祀を統括する洪陵奉香会·李東宰会長(右)
シンポジウムを主催した古澤千代勝会長は、「私自身も敗戦後、教育労働者として社会科を担当して来たが、日本国がどんなことをしてきたかについては不十分だったと深く反省している。明成皇后のことについても正しく認識しておらず、退職して初めて知った」とし、「同じ過ちを繰り返さないために、このシンポジウムを計画した」と趣旨を語った。

続いて、大韓帝国の皇帝·高宗のひ孫に当たる李源(イ·ウォン)大韓皇室文化院総裁は、「今年は、高宗皇帝が大韓民国を宣布してから120周年になる。1807年10月12日、高宗は500余年に及ぶ中国との「事大関係」を断ち切り、「圜丘壇」(祭天の儀式が行われた史跡、大韓民国指定史跡第157号) に登って天祭を執り行い、皇帝に即位して自主独立であることを宣明した。今年10月に日本によってなくされた「圜丘壇」をソウル市庁の広場に建て直し、「圜丘大祭」を奉行する予定である」と明らかにした。

そして、高宗皇帝·明成皇后の祭祀を統括する洪陵奉香会の李東宰会長は、「2015年に東京の退職教員総本部の方々が明成皇后陵の前で遅ればせながら殺害の事実に対し日本人を代表して謝罪した」とし、「この会は熊本会議を切っ掛けに集会を開催することになり、今後更に親密な集会に発展させるために、この度大韓帝国の嫡流であり高宗のひ孫である李源皇嗣孫と共に17人が来日した」と述べ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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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源総裁(中央)、福岡空港にて
「日本の近代化過程と日韓関係」と題して講演を行った大阪大学の猪飼隆明名誉教授は、「1894年、朝鮮半島において甲午農民戦争といわれる大農民闘争が展開された。これに恐怖した朝鮮政府は誤りを犯し、清国軍の救援を仰いで、農民軍を抑えようとした。これが、日本の介入を招き、日清戦争が引き起こされ、この戦争は、日本軍による王宮占領から始まり、戦争の終わった1895年10月に、王宮に押し入った日本人による明成皇后殺害事件に結果した」と説明した。

しかし、日本国民全体が政府の行う侵略主義的朝鮮政策を支持したわけではない。「田山正中という人は、征韓論について「日本国内の問題を隣国を襲うことで解決しようとし、朝鮮を征服して我がものとなすことで、ロシアを防ごうとしている。事を朝鮮に起して、日本国民の士気を振るわせようとしているが、日本が朝鮮に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は、列強が日本にしてきたことと同じだ」と激しく非難した。

彼は、「朝鮮の人心は、「厚く信を好み固く義を守り、その気質の美なるは、アジア州中の秀絶なり」とあるが、このような国を撃とうとするのはもっての外である」と力説した。

そして、このような良心と知性の運動は熊本にも顕著にあった。「熊本の実学派という改革派の集団を作った横井小楠は、朝鮮の李退渓の学問を受け継いだ人物で、「義の行われている国との交際は進めるべきだ、そうでない国の要求は断然拒絶すべきである」と主張した。また、宮崎民蔵·弥蔵·滔天の三兄弟は、福沢諭吉らが脱亜論を主張して、朝鮮·満州への侵略を鼓舞したのとは対照的に、アジア連帯論を終生主張し続けて活動した。

最後に、猪飼名誉教授は、「熊本から明成皇后史跡訪問が13回も行われ、今年も計画されているのは、この挙が、おそらくこのような良心と知性の運動の中にあることを意味しているからだ」と結論付け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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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ンポジアム会場
パネルディスカッションの中で洪陵奉香会の李洸鎔副会長は、「悲痛な歴史を知り振り返る事も必要だが、隠されて見えないところを探し、良いところを明らかにすることの方が、更に重要である」と強調しながら、高宗実録36巻にある明成皇后の人柄に対する記述を紹介した。

「親孝行者·情深い。子女教育に非常に熱心であり、本を通して理解力を広げ、討論を通して判断力を養う。良妻賢母であり、気配りが良く、周りをキャッチする。国母として国民を思う心情が深い。国民が天災などで苦しんでいれば援助したり、心配りが良いので、国民から信頼を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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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陵奉香会訪日団は、3日、熊本民団、退教協、福岡民団、総領事館、節信院、正法寺などを訪問し友情を深め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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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大学·猪飼隆明名誉教授(左)、アジアニュース·金金山代表(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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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国根性 大陸根性 半島根性】金 文学/日中韓の比較文化学者
【東洋人と言われるのが一番好き】金 文学/日中韓の比較文化学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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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교류】홍릉봉향회·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구마모토 한일심포지엄 개최

PicsArt_06-03-04.51.40.jpg日本語
6월 2일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교육회관에서 '한일의 과거를 직시하고 새로운 우호 협력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한일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이 심포지엄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주최하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구마모토지부·평화헌법 살리기 구마모토현민의 모임·구마모토현퇴직교직원등 연락협의회가 후원했다.

청일전쟁 종결 후,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 낭인'이라 일컬는 민간인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을미사변)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서양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그 범인들을 일단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시켜 놓고, 그후 재판에서 미우라 고로 등 48명을 '증거불충분'으로 방면했다.

이렇게 현대의 한국과 일본의 비극은 을미사변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가장 큰 이유도 '명성황후 시해죄'였다. 그런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하수인이었던 48명 가운데 21명이 구마모토 출신 청년들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2004년 구마모토의 교사 30여명을 중심으로 결성돼, 그 이듬해 소속 회원들이 명성황후 시해범의 후손들과 함께 명성황후릉 앞에서 사죄한 이후 매년 명성황후기신제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참배하고 있다.
PicsArt_06-03-07.21.28-2.jpg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후루사와 치요카츠 회장(왼쪽), 고종황제·명성황후의 제사를 총괄하는 홍릉봉향회 이동재 회장(오른쪽)
심포지엄을 주최한 후루사와 치요카츠 회장은 "2차대전 패전 후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사회 과목을 담당했지만, 과거 일본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그동안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점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 명성황후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은퇴하고 나서 처음 알았다" 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이 심포지엄을 기획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어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증손자인 이원(李源) 대한황실문화원 총재는 "올해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1807년 10월 12일 고종은 500여년에 걸친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끊고, 원구단(圜丘壇, 제천의식이 거행된 사적, 대한민국사적 제157호)에 올라 천제를 지내고 황제에 등극하며 자주독립국임을 선명했다. 올해 10월에는 일본에 의해 제거된 원구단을 서울시청 광장에 세우고 원구대제를 봉행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고종황제·명성황후의 제사를 총괄하는 홍릉봉향회(洪陵奉香会)의 이동재 회장은 "2015년 도쿄의 퇴직교원총본부 회원들이 명성황후릉 앞에서 뒤늦게나마 시해사건에 대해서 일본인을 대표하여 사과했다"며 "이 모임은 구마모토의 활동을 계기로 집회를 열게 되었으며, 앞으로 한층 친밀한 모임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금번 대한제국의 적통이며 고종황제의 증손자인 이원(李源) 황사손(皇嗣孫)과 함께 17명이 방일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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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총재(중앙), 후쿠오카공항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한일관계'라는 주제로 발표한 오사카대학의 이카이 다카아키 명예교수는 "1894년 한반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대농민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를 두려워한 조선 정부가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군의 개입을 촉발한 결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일본군의 왕궁 점령으로부터 시작돼 전쟁이 끝난 1895년 10월 왕궁에 침입한 일본인들에 의한 민비 시해사건으로 그 막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본 국민 전체가 일본 정부의 침략지향적인 대조선 정책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다야마 마사나카(田山正中)라는 인물은 정한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일본의 국내 문제를 이웃나라에 전가하여 해결하려는 수작이며, 조선을 정복해 우리 것으로 만들어 러시아를 막아보겠다는 속셈이다. 조선에서 내란을 일으켜 일본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일본의 태도는 열강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선의 인심은 '돈독한 신(信)을 좋아하고 의(義)를 견고히 지키며 그 기질의 아름다움이 실로 아시아의 으뜸'이라고 했는데, 이런 나라를 짓밟으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역설했다.

이와 같은 양심·지성운동은 구마모토에서도 활발히 일어났다. "구마모토 실학파라는 개혁파를 만든 요코이 쇼난은 퇴계 이황의 학문적 계보를 이어받은 인물로서 "의로운 나라와는 교역하되 그렇지 않은 나라의 요구는 단연코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야자키 다미조·야조·도텐 삼형제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탈아론을 주장하며 조선·만주 침략을 자극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생 동안 아시아 연대론을 주장하며 활동했다."

마지막으로 이카이 명예교수는 "구마모토에서 그간 13차례나 '명성태황후 사적 방문'이 실시되고 금년에도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바로 양심·지성운동의 계보 가운데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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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 회장
패널토론회에서 홍릉봉향회 이광용 부회장은 "비통한 역사를 알고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던 긍정적인 면을 재조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고종실록 36권에 기록된 명성황후의 인품에 관한 내용을 소개했다.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다. 자녀교육에 대해 열성적이며, 책을 중심으로 토론하면서 판단력을 기른다. 현모양처이며 주변을 잘 살펴 분위기 파악을 잘한다. 국모로서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천재지변 등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잘 돌봐주고 배려하여, 칭송과 신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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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봉향회 방일단은 3일 구마모토민단, 일본퇴직교직원연락협의회, 후쿠오카민단, 총영사관, 절신원(節信院), 정법사(正法寺) 등을 방문하여 우정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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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대학 이카이 다카아키 명예교수(왼쪽), 아시아뉴스 김금산 대표(오른쪽)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특집2】김옥균과 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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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교류】평화를 사랑하는 유네스코 "사람들 마음에 평화를 심자"
【한일교류】헤이트 스피치 対 러브 스피치
【한일교류】조선의 은인들:일본인 독립운동가
【한일교류】일본의 고대사 컴플렉스와 한국의 근대사 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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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年06月0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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