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참회와 화해의 상징으로 세워진 후쿠오카 셋신원(節信院)의 자안(子安)관음상

PicsArt_06-04-05.13.51.jpg6월 3일, 셋신원을 방문한 대한황실문화원 이원 총재와 홍릉봉향회 방일단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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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시내의 작은 사찰 셋신원(節信院)의 정문 옆에 온화한 미소를 띤 석상이 하나 서 있다. 놀랍게도 이 석상은 일제에 의해 잔인하게 죽은 명성황후를 애도하는 관음보살상이다.

이 석상은 명성황후 암살 13년 후인 1908년에 세워진 것으로, 제작자는 다름 아닌 황후에게 직접 칼을 휘두른 '도 가츠아키(藤勝顕)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는 일본 우익 민족주의 단체인 겐요샤(玄洋社) 소속 멤버였다.

겐요샤는 일본 극우단체의 시조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満)가 메이지유신으로 몰락한 무사계급 출신들을 모아 후쿠오카에서 조직한 것으로, 전후 맥아더 군정에 의해 해산됐으나 이후로도 일본 총리들이 그들의 조언을 구할 정도로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일본 정부가 직접 개입한 정황을 은폐하기 위해 사조직인 겐요샤 출신의 미우라 고로 조선 공사를 앞세워 그를 통해 낭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도 가츠아키가 휘두른 두 번째 칼이 왕비를 절명시킨 것이라고 하나, 아직 그 사실을 단정할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도 가츠아키가 명성황후 암살에 직접 관여한 것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건이 발생한지 13년이 지난 뒤, 도 가츠아키는 범행에 사용된 자신의 일본도를 할머니가 평소 다니던 셋신원에 보관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암살에 사용되어 더러워진 칼을 불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금칙 조항 때문에 구시다(櫛田)신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가 숨질 때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꼭 공양하고 싶다"며 도 가츠아키가 명성황후를 위해 관음보살상의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편으로는 황후를 살해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장모가 공양을 제안했다는 설이 있다. "무사들과 함께 조선 왕궁에 쳐들어가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베고 왕비를 죽인 것은 인정상 도저히 견딜수 없는 일"이라고 노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초 거액을 들여 제작된 청동관음상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군수물자로 징발돼 녹아 없어지는 비운을 겪게 된다. 게다가 45년 미군의 후쿠오카 대공습으로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셋신원마져 사라질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이 관음상이 다시 빛을 보게된 것은 대공습 다음날 어느 독지가 부부가 관음상이 있던 자리에 홀로 버려져 있는 여아를 발견한 것이 그 계기였다. 부부는 너무 안쓰러워 여아를 데려다가 친딸처럼 애지중지 키웠는데, 운명의 장난이런가 그마저 19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호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으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던 부부는 딸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불상을 세우기로 했다. 셋신원에 불상을 기부하려다 딸을 처음 발견했던 그곳에 본래 관음상이 있었다는 사연을 듣고, 관음상의 형상과 딸을 형상화한 아기상을 석상으로 재현해 봉헌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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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셋신원(節信院) 자안(子安)관음상
이처럼 한 손엔 여자 아이를 안고 또 한 손엔 연꽂을 들고 자비로운 미소를 띤 채 앉아 있는 자태의 '자안(子安)관음상'은 명성황후의 삶 만큼이나 애절한 곡절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본에 알려지게된 계기는 지난 88년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인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씨가 '민비 암살'이라는 책을 펴내 큰 반향을 일으킨데서 비롯된다.

쓰노다 씨는 "한국에서는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건을 가해자측인 일본에서는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적지않게 놀랐다"며 한일친선, 상호이해 등의 단어가 공허하게 느껴졌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또한 "오래전 사건이지만 한국판 '추신구라(忠臣蔵, 47인 사무라이의 복수극)'이며, 한국의 국민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것을 '오늘의 문제'로 생각하게 됐다"며, 극단적인 역사인식의 차이야말로 한일 양국을 가깝고도 먼 나라로 만드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가토 마사히로(加藤昌弘) 셋신원 주지는 "민비는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됐다"고 안타까워 하며, 명성황후를 상징화한 이 관음보살상은 이 지역에서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할 수 없다는 참회와 화해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였던 겐요샤의 도야마 미쓰루는 그가 평소 존경했던 가토 시쇼(加藤司書, 주지의 조부)가 잠들어 있는 셋신원에 자주 들러 그의 묘비 앞 석단 위에서 무릎을 꿇고 참배했다고 한다.

DSC_1089.JPG"절신원에 방문하여 기도합시다"라며 셋신원 가토 씨에게 우정을 전달한 황사손 이원 총재(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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