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지탑(不二之塔)】구마모토 정법사 아카보시 스님, 강제노동 희생자 공양탑 건립 '근원은 하나, 둘이 아니다'

DSC_1072.JPG6월 3일, 불이지탑·중국인 순난자 위령탑 앞. 정법사 아카보시 요시오 주지(뒷열 오른쪽에서 4번째), 대한황실문화원 이원 총재(뒷열 중앙) 및 홍릉봉향회 방일단 일행과 함께.
日本語
구마모토현 아라오시(熊本県荒尾市)에 있는 정법사(正法寺) 경내에는 2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중국인 순난자 위령비'와 '불이지탑(不二之塔)'이라고 쓰여 있는 '조선인 순난자 위령비'이다. 1972년 이 절의 주지였던 아카보시 요시히로(赤星善弘) 명예주지가 미이케(三池)탄광으로 강제연행돼 사망한 조선인·중국인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구마모토현에는 '달이 떳다 떳다 미이케탄광 위에 떳다'라는 '탄광 민요'로 유명한 '미츠이미이케(三井三池)탄광'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개전 후 일본의 탄광이 '내일 10톤보다 오늘 1톤'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증산을 강요하자 미이케탄광이 그 중추 역할을 했다. 농민, 학생, 미·영·호주의 연합군 포로는 물론 한반도와 대만에서까지 거의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끌어모았다.

이 탄광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은 5000여명. 후쿠오카현 오무타시(福岡県大牟田市)와 구마모토현 아라오시의 19개소에 수용소가 있었으며, 작업 중 사고나 혹사 등으로 사망한 조선인·중국인 사망자수가 약 700명에 이른다. 이 사망률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단지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PicsArt_06-04-10.01.53.jpg
조선인·중국인이 강제노동으로 시달인 규슈지역 탄광 위치
아카보시 스님은 13세에 불가에 입문하여 고야산(高野山)에서 수행하면서 공해·홍법대사(空海·弘法大師)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대사께서는 중국으로 건너가 밀교를 전했다. 만일 지금 살아계신다면, 틀림없이 조선인·중국인 희생자 공양을 하실 것이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다"라고 스스로 깨달았다.

공양탑 건립 비용은 탁발로 모으기로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공양하는 마음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취지문를 들고 스님들과 함께 걸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호소했다. 그런데 역사의 진실을 호소한다는 것은 곧 미츠이광산의 과거를 들춰내는 것이기도 했다. 탁발 나갔다가 돌에 맞기도 하고 공갈 협박을 받기도 했다. 우익들에게 "너는 공산당이냐" "미츠이광산의 지난 상처를 들추지 말라"고 공격당했다.

이렇게 3년 남짓 걸려 35만엔을 모았다. 1972년 4월 중국인 순난자 공양탑 제막식이 열렸고, 그로부터 5개월 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총리가 방중, 중·일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국교가 정상화되자, 이번에는 "아카보시 씨는 선견지명이 있다"며 칭찬을 들었다. 도쿄 우에노(上野)동물원에 중국 팬더가 들어오는 등 일본에서 갑자기 중국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인 희생자탑의 비명은 좀처럼 결정되지 않았다. 조총련은 '조선인 순난자비', 민단은 '한국인 순난자비'. 게다가 한 자리에 모여 의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양측 사무실을 15번씩 방문했지만 여전히 평행선이었다. 어느쪽도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불교에 '불이(不二)'라는 말이 있는데, '근원은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결국 '불이지탑'이라 정하고 양측의 동의를 얻어냈다. 비의 명칭을 둘러싼 민단과 조총련의 갈등 때문에 "결국은 평화적으로 통일될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남북이 하루속히 하나가 되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다.

동년 10월 '불이지탑' 제막식 때는 조총련과 민단이 모두 참석했다. 그런데 이듬해 위령제 때부터 민단이 동석하지 않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직후, "동서독도 통일하지 않는가. 여러분도 같이 공양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제연행 때는 두 나라가 아니었잖습니까"라고 설득해 겨우 남·북·중 합동위령제가 실시됐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PicsArt_06-04-10.23.09.jpg
중국인 남북조선인 순난자 합동위령제(2017.4.12)
아카보시 스님은 강제연행된 조선인·중국인의 공양 뿐만 아니라 매년 10월 서울을 방문해 일제시대의 정치범 수용소였던 서대문형무소에서 법회를 연다. 또한 난징과 서안 등 중국 각지와 미얀마, 필리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 등을 방문하여 종교와 국경을 초월해 전쟁 희생자들을 위로해 왔다.

스님은 "일본은 전쟁의 부(負)의 역사를 가급적 건드리지 않고 일본의 근대화를 성취한 위대한 역사만을 전하려 든다. 하지만 가해자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참회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나서 상대가 용서할 때 비로소 '진정한 우호친선'이 성립된다. 그런 참회의 마음을 담아 공양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미츠이미이케탄광'의 세계유산 등록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 "세계유산 등록이란 '세계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문화유산이나 자연유산을 '인류를 위한 세계유산'으로 보호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인류'의 재산으로 등록하는 것인 만큼, 더욱 역사의 다면성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일교류】다큐멘터리 영화 '꽃처럼, 있는 그대로'

"【불이지탑(不二之塔)】구마모토 정법사 아카보시 스님, 강제노동 희생자 공양탑 건립 '근원은 하나, 둘이 아니다'"へのコメントを書く

お名前:
メールアドレス:
ホームページアドレス:
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