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호 칼럼】훈민정음 창제원리 복원이 한글 세계화 열쇠

PicsArt_10-10-05.13.05.jpg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보배로운 글자이다. 바야흐로 훈민정음에 대한 각론 연구가 필요한 때를 맞이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는 천문도 내지 천부경과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은 모두 천문도인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천문과 자연법칙에 따라 천지인을 기본으로 창제된 문자이기에 인간을 비롯한 천지 만물, 우주, 하늘의 소리와 하나님의 심정까지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인(• ㅡㅣ)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 천부경과 연관지어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연구하는 작업이 시도되어야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이나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에서 보듯이 그 창제원리를 명확히 밝힌 글자는 세계 역사상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세종은 탁월한 천문학자이자 최고의 음운학자이기도 했다. 훈민정음을 28자로 만든 것도 천문도의 스물여덟 별자리에 근거한 것이다.

'단기고사(檀奇古史)'에 따르면 단군조선 제3세 가륵단군이 "박사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국문 정음(正音)을 정선(精選)하다"라고 했고, 고려 때 행촌 이암(李嵒)이 지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도 같은 기록이 전해지는데, 특히 정음 38자에 대한 글자 모양 '가림토문(加臨土文)'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모음 11자를 포함한 이 38자는 세종의 훈민정음 28자와 모양이 같으며 세종 때 그 중 10자가 줄었다. 천문도 28개 별자리에 맞추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당시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에 극렬히 반대했으나 실은 그들의 학문 깊이가 세종의 음운학 지식에 한참 못 미쳤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신미대사(信眉大師)였다. 그는 중국어, 일어, 몽골어, 티벳어, 만주어 그리고 특히 범어인 산스크리트어 등 6개 언어에 능통했고 음운, 문법 등 언어 전문가였다. 그가 주석했던 법주사(法住寺)와 말사인 복천암(福泉庵)에는 그가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주역이었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훈민정음이 가림토문자의 변형·발전이라는 설도 있는데, 2015년 3월 13일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명마산 바위에서 '가림토 비석'이 발견돼 그 신빙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가림토문은 받침 문제를 해결하지 못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인물이 바로 신미대사였다. 그는 받침이 없는 가림토문을 발전시켜 산스크리트어의 음운원리와 비교연구함으로써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1435년 신미대사는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를 훈민정음으로 풀이해 간행했는데, 이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1443년 보다 8년 앞선다. 당시 신미대사는 정음청 도감이었으며, 궁중에서 출간되는 모든 책을 관장하는 직책에 있었다. 문종이나 수양·안평대군도 신미대사와 사제관계였으며, 세종의 딸 정의 공주의 부군 안맹담도 그에게서 사사했다.

신미대사가 언해한 '능엄경언해' '법어록' 등은 '훈민정음 해례본' '동국정운'과 훈민정음의 글자가 일치한다. 훈민정음으로 지어진 불교색 짙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나 수양·안평대군의 '석보상절(釋譜詳節)', 세종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신미대사의 영향이 컷으리라고 본다.

유학 이념의 토대 위에 세워진 조선이었지만, 아직 백성들 대부분은 고려시대에 뿌리 깊이 정착된 불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 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알기 쉬운 훈민정음으로 백성들이 불교를 이해하도록 도와 부녀자와 민중들이 조정과 세종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관민 화합을 도모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3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훈민정음은 28자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에서 아침 저녁으로 범종을 칠 때 그 횟수가 28번과 33번이다. 28은 하늘의 28수(宿) 또는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 등 스물여덟 하늘을 가르키며 33은 불교의 33천을 상징한다.

또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세종의 훈민정음 어지(御旨)는 정확히 108자로 이루어져 있다. 108은 번뇌의 수이다. 한문으로 적은 어지는 108자의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이었지만 세종은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신미대사를 가까이 하며 훈민정음 창제에 큰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지난 10월 9일 한글날 행사 중 세종의 '훈민정음 해례본'을 낭독할 때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내 이를 어엿비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라고 했다. 그런데 식이 끝날 무렵 '한글날 노래'를 제창할 때, 제2절에서 "볼수록 아름다운 '스물넉자'는 그 속에 모든 이치 갖추어 있고"라고 노래했다. 세종은 분명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는데 왜 '스물넉자'를 만들었다고 한단 말인가.

세종이 만든 28자 중 현재 쓰이지 않는 네 글자는 '• ㆆㅿㆁ'이다. 왜 넉 자가 빠진 24자만 사용되고 있는가. 그 연유가 무엇인지 사람들 대부분은 무심코 지나치거나 잘 모르고 있다. 이 넉 자가 뚜렷이 사라진 것은 일제시대 때부터이다. 우리 말과 글을 말살시키는 것이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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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재원 훈민정음연구소장은 사라진 옛 글자 복원이야말로 한글 세계화의 열쇠라고 주장한다. 40년 가까이 한글을 연구한 그는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 28자로 세계 언어를 90% 이상 완벽히 표기할 수 있다며 영어, 일본어, 중국어는 물론 힌디어, 미얀마어까지 무려 21개 언어를 훈민정음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게다가 사라진 넉 자의 휴대폰 배치와 세벌식 자판과의 연결도 제시해 주고 있어 앞으로 한글의 정보화와 세계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동안 너무 힘겨워 다 집어치우고 탈출하려고 수차례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세종대왕이 꿈에 나타나 음가를 짚어주는 등 고비 때마다 암시 같은 것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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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으로 뺀 넉 자의 음가를 다시 되살려 모두 사용할 때 보다 더 정확한 제 소리를 낼 수 있고 제대로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 네 글자를 복원함으로써 비로소 보다 정확한 외래어 표기도 가능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세종의 뜻을 현대에 가장 잘 실천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덪붙여 현재 한글 중성 순서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는 훈민정음 중성 순서 ' • 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와 다르며, 초성 순서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도 훈민정음 초성 순서 'ㄱㅋㆁ, ㄷㅌㄴ, ㅂㅍㅁ, ㅈㅊㅅ, ㆆㅎㅇ, ㄹ, ㅿ'와 다르다. 이는 조선 중종 때 학자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따른 것이나 원래 훈민정음은 천문원리대로 배치돼 있었다. 이 또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세계 언어학자들이 극찬하는 우리 한글을 더욱 다듬고 빛내는 일에 우리 모두가 긍지를 갖고 힘써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정보채널 iNTV 김주호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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