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호 칼럼】거국적인 '국사(国史)광복운동'으로 잃어버린 민족혼 되찾아야

우리 민족의 상고 사료가 멸실된 내막을 보면 외세의 침략에 의한 원인(전란에 의한 방화, 탈취 등), 내부 통치 권력자의 정치적 의도, 종교적 외세에 의한 핍박과 사대 곡필 등이다. 
  
가장 큰 원인인 정치적 외세에 의한 사료 멸실은 적어도 '10대 수난사'를 들 수 있다. 

①고구려 동천왕 20년(246) 10월 위장(魏將)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환도성을 공함하여 많은 사서를 소각함. 
②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에 사자성이 함락되면서 사고(史庫)가 소진됨.
③고구려 보장왕 27년(668) 당나라 장군 이적(李勣)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典籍)들을 모두 탈취해 감.
④신라 경순왕 원년(927) 후백제의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의 서적들을 전주(당시 完州, 후백제 수도)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멸당할 때 방화 소각됨. 
⑤고려 인종 4년(1129) 금나라에 상국(上國)의 서표를 바친 후 주체 서적을 가져 감.
⑥고려 고종 20년(1233) 몽골의 침략으로 홀필렬(忽必烈)에 의해 소각됨(삼한고기, 해동고기가 이 때 없어짐).
⑦조선 태종 11년(1411) 5부 학당을 송나라 제도에 따라 설치하면서 유학을 장려하고 비 유학 서적 일체를 소각함. 
⑧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전적들이 방화에 의하여 소실됨. 
⑨병자호란(1636) 때 귀중한 사서들이 수없이 잿더미가 됨.
⑩일제 강점(1910) 이후 식민지 정책(조선사편수회 사업)의 일환으로 군경을 동원 탈취, 날조, 소각 등 만행을 자행함.
  
외세에 의한 10대 사료 수난사
  
이상에서 보듯 우리 민족의 사료 수난사는 눈물겹다. 그 중에서도 수탈, 소각, 인멸 등이 가장 극심했던 암흑기는 일제 강점기였다. 그들은 한일합병이 된 1910년부터 조선사 편찬 사업이 완료되기 1년 전인 1937년말까지 장장 27년에 걸쳐(조선사 편찬 사업은 1916년 1월부터 시작) 사료 모집이라는 명분 아래,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규장각 소장 사적(史籍)은 물론 서울 종로 일대의 서점들을 비롯, 전국의 서사(書肆), 향교, 서원, 사찰, 서당, 고가, 권문세가 등을 급습, 단군 관련 사서 또는 우리 민족의 정신이 깃든 고유 사서들을 닥치는 대로 압수 탈취해 갔다. 
  
일본이 패망할 때 모든 근거 자료를 불태워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 자세한 내막을 다 파악하기 어려우나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조선총독부(취조국)가 탈취 소각해버린 사서만 약 51종 20여 만 권에 달한다. 그러니 27년 동안 말살시킨 사료가 얼마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일제는 이러한 서적의 판매를 엄금하고, 그 소지자와 열독자를 처벌했던 것이다.(1910년 11월~1911년 12월 관보, 김진학·한철영 공저 '제헌국회사' 22쪽, 문정창 저 '군국일본 조선강점36년사' 상권80쪽, 중권455쪽)
  
이상시(李相時)의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53~54쪽)에 따르면, 현존하는 고사(古史)로는 단군에 관한 내용은 한마디도 없는 고려시대의 어용사서이며 사대주의 사서의 표본인 '삼국사기'와 단군을 불교 색채로 윤색해 놓은 불가사 서류인 '삼국유사', 단군에 관해 비합리적이고 객관적 타당성이 결여된 존화사대적 사서 내지 어용사서(東國通鑑 등 약 15, 6종)등 20여종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일제는 식민정책의 하나로 우리가 상고사를 찾는데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책들만 몇 권 남겨두었던 것이다.

단군과 단군조선을 합리적, 객관적이고 타당성 있는 즉, 사실(史實)을 기초로 하여 실사로 편찬 저술된 이른바 도가사서(道家史書)들은 거의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기적적으로 전해오는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한단고기(桓檀古記) 등 몇 권이 있을 뿐이다. 오늘 우리가 상고사 복원에 애로를 느끼는 사료 빈곤이 바로 이러한 사료 수난사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공분심을 갖고 역사회복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식민사관 복사판, 국사(国史)광복을 절감 
  
반만년 문화민족사를 말하면서 어찌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국한할 수 있겠는가. 정사라 일컫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남겨질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식민정책의 일환일 뿐이다. 단군조선을 비롯한 고대 한국사를 사실(史實)로서 기록해 놓은 사서라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현행 '고등학교 국사'(32~33쪽) 교과서를 한 예로 보자.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 아니 "하였다고 한다"라니. 남의 말하듯이 기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가 하면 연나라 사람으로 고조선에 망명 귀화했다가 준왕을 내쫓고 기자조선의 왕 자리를 찬탈한 인물인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이 우리 고대사의 첫 머리인양 기술하고 있다. 이야말로 식민사관의 복사판 아닌가. 단군 고조선과 기자조선은 아예 빼버린 채 말이다. 
  
아직도 일제가 우리 역사를 철저히 말살하고 심어놓은 침략적 식민사관에 중독된 채 깨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개탄스러울 뿐이다. 단기 4350년 개천절을 맞이하여 거국적인 국사(国史)광복운동을 펼쳐 잃어버린 민족혼을 하루속히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민족종교 대기자 김주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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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광복운동 촉구 기자회견/(사)국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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