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개신교, 다시 거듭나야 '예수님은 인간인가 하나님인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신약성경은 4세기 무렵 작가들에 의해 편집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안에 의해 크리스천에 관한 모든 문서가 소멸되고,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신약성서의 상당 부분이 당대의 구미에 맞게 다시 쓰여졌다.

313년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인정한 콘스탄티누스는 원래 페르시아의 태양신인 미트라(Mitra)를 신봉했던 사람이었다. 미트라는 고대 아리아인에 의하여 신앙되었던 '계약의 신'으로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Maitreya) 즉 '미륵'과 어원이 같다.

PicsArt_07-10-04.43.35.jpg

결과적으로 미트라 신앙의 교리나 의식, 제도, 관습 등이 그대로 기독교에 수용되었다. 미트라는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의 아들로서 중개자이며, 12월 25일 처녀한테서 태어나 12제자를 거느렸고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했다. 구세주의 고통과 형벌로 구원받는 교리, 최후의 만찬, 최후의 전쟁, 죽은 자가 부활하는 종말, 재림, 천국과 지옥 등도 비슷하다.  

4세기까지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생일을 1월 6일로 알고 생일 잔치를 하다가, 서기 353년 로마 교황 리베리우스에 의해 예수님의 생일이 12월 25일로 제도화되었다. 태양신을 믿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12월 25일은 축제일이자 조로아스터의 생일이었다.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내용은 고대 신화들과 닮아 있다. 흰두교의 크리슈나의 어머니도, 이집트의 호루스의 어머니도, 메소포타미아의 조로아스터의 어머니도, 희랍신화의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도, 이브의 어머니 소피아도 동정녀였다.

성자 크리슈나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갠지스강 강가에서 세례를 받았다. 나무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하나님' '구세주'로 불리워졌고 흰두교의 삼위일체 가운데 두 번째 위격이었으며, 자신을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했으며 나환자와 맹인, 귀머거리를 치료했다.

12월 25일 동굴에서 태어난 호루스는 30세 때 세례를 받고 12제자를 거느렸다. 기적을 행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물 위를 걸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무덤에 묻혔고 부활했다. 호루스는 길이요 진리요 빛이요 메시아로 칭송받았다.

조로아스터는 12월 25일 처녀에게서 태어난 위대한 방랑교사였으며, 기적을 행하고 12제자를 두었다. 그는 무덤에 묻혔다가 3일 만에 다시 부활했다. 그가 부활한 날에 페르시아의 교도들이 축제를 벌였는데 이는 기독교의 부활절과 일치한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원래 하나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인자'라는 말을 즐겨 썼다. 그후 '예수님이 인간인가 하나님과 동등한가'라는 논쟁이 일어나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분열된 국론을 규합하고 넓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강력한 교리가 필요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교리의 대립을 수습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다'고 일방적으로 의결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몰려 추방당하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아타나시우스파는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아 왔다.

PicsArt_07-10-10.23.51.jpg아타나시우스를 위시하여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과 함께 니케아 신조를 들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운데)

지금의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설법,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12-29세의 예수님이 인도, 티벳 등 동양으로 건너가 동양의 진리를 습득했다는 기록은 교회와 기독교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내용으로 여겨져 모두 삭제됐다.

예수님의 잃어버린 생애를 기록한 대표적인 서적은 리바이 도우링(Levi H. Dowling) 목사가 영계의 기록(아카샤)을 보고 쓴 '성약성서(보병궁 복음서)'와 1963년 예수님의 무덤에서 발견된 '탈무드 임마누엘', 러시아의 고전학자인 니콜라스 노토비치(Nicholas Notovich)가 라마승으로부터 전해받은 기록을 바탕으로 출간한 '이사전' 등이다.

보병궁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이 12세 되던 때, 인도 오릿사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에 참석차 왔다가 예수님의 총명함에 반해 예수님의 부모를 찾아가 그에게 동양의 지혜를 배우도록 인도 유학을 청원한다. 예수님은 오릿사주 쟈간나스의 절에 들어가 4년간 수행하며 베다 경전과 마니 법전을 배우고, 인도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인도 최고의 의원이었던 우도라카의 제자로 입문한다.

그러나 절대 평등을 주장하던 예수님은 인도의 신분제도(카스트)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정죄하려는 승려들을 피해 네팔로 피신한다. 그후 티벳사원에서 성현 멘구스테를 만나 고전을 공부하고, '광명의 부처' '살아있는 신탁'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24세 때 고향에 돌아왔다가, 다시 희랍을 거쳐 이집트에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에 입회한다.

그리고 성실, 공정, 박애, 신앙, 의열, 성애의 여섯 단계의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써 극복하고 이집트 밀교의 비밀과 생사의 문제, 태양계 밖의 세계의 비밀을 배우고 보랏빛의 방에서 마지막 7번째의 시험을 마친다. 마침내 '그리스도(하느님의 사랑)'라는 최고의 법명을 받고 티벳을 마지막으로 29세에 귀국했다고 한다.

IMG_20170710_050925.jpg
보병궁 복음서 안동민 역 동민문화사 1973년 초판

이처럼 예수님은 남루한 차림으로 흙바람 속에서 산기슭에서 선잠을 청하며 구도생활을 했다. 그런데 사후 예수님은 가련한 중생들과 동떨어진 하나님으로 신격화되었고, 그 반대로 교회는 급속도로 세속화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모든 금욕의 자취는 교회에서 사라지고 신앙은 상품화되어 갔다.

16세기의 천재 화가 라파엘로는 고난의 예수님 대신에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그렸다. 그는 이탈리아의 지배 계급을 모델로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물질적인 사치와 위대성을 그리며 엄청난 부를 누리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한국교회의 토착화 과정에서 제작된 성화나 성상, 순교자들의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의 신비가 라즈니쉬가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신격화는 콘스탄틴의 착안이었다. 이에 대해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 모든 신격화에 대해 당장 '멈추라'고 항의했다. 예수님을 팔아먹는 거짓말을 그만두고, 기독교를 다시 본래 위치로 되돌려놓으라고 절박하게 외쳤다.

이제 500년 전 '오직 성경, 은혜 그리고 믿음'을 구호로 출발한 개신교가 다시 한번 거듭나야 할 때이다. 예수님의 출생의 비밀은 물론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성경의 난문제들을 밝히 해명함으로써, 저마다 각양각이하게 해석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필연적인 교파 분열을 지양하고, 이를 발판으로 종교화합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この記事へのコメント


この記事へのトラックバッ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