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年06月16日

【해양강국의 개척정신】"안정성에서 불안정성으로" "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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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국토 면적 당 해안선 길이가 일본이나 영국보다 길고, 미국-일본-한반도-중국-동남아-유럽으로 가는 항로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세계 주요 도시들이 대부분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와 같은 지리적 특성을 잘 활용하면 우리나라는 동북아 물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왜 아직까지 해양강국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통일신라 때만 해도 장보고는 바다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국제무역을 장악했다. 왕건 가문도 해상세력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아랍과의 교역도 왕성하여 조선 세종 때까지 우리나라에 회교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시대에 들어와 장보고의 해양강국의 맥이 끊어지고 만다.

조선의 이른바 '공도(空島)정책' 때문이다. '섬을 비워둔다'는 공도 조치는 고려 말부터 나타났다. 서남해 해상세력이 삼별초 세력에 동조할 것에 대한 우려와 왜구와의 연대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에서 나온 조치였다. 이 조치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가 정책으로 전면적으로 실시된다.

조선은 정기적으로 '수토관'을 각 섬에 파견해 섬에 사는 주민이 있으면 육지로 데려왔다. 게다가 허락없이 섬에 몰래 들어간 자는 곤장 1백대의 형을 받는 것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섬에 도피·은닉한 죄는 본국을 배반한 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려져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공도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배경에는 모든 백성이 국왕의 지배와 보호하에 편제되어야 한다는 통치이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섬은 원칙적으로 국왕의 지배와 보호가 미치는 통치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행정 편제의 대상에서도 배제되었다. 따라서 육지를 떠나 섬으로 들어가 거주하는 행위는 국왕의 통치권에서 벗어난 범법행위로 다스려졌다.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공도정책 뿐만 아니라 명의 '해금(海禁)정책'도 그대로 수용했다. '해금'이란 바다로 나아가 외국과 통교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하해통번지금(下海通番之禁)'의 약칭이다. 해상무역·해상교통 뿐만 아니라 어업까지도 규제하는 해양 통제정책이다. 바다에 나가 무역하는 것은 물론 아예 바다에 나가는 것조차 금했다.

중국은 당·송·원 때까지만 해도 다른 나라와의 교역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동남의 해상 세력을 견제하고 탄압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폈다. 송·원이 대외교역으로 실리를 중시하는 개방정책을 폈다면, 명은 농업 위주의 폐쇄정책을 폈다. 명은 조공무역만 제한적으로 허용했으며, 이것이 조선의 해금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바다를 꺼리게 되고 바다를 장애물로 여기게 됐다. 바다를 막은 조선은 경제·문화적 자폐주의에 깊이 빠져들었고, 조선 초기의 지도에서조차 섬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조선방역지도'에 표기된 섬은 제주도·대마도·진도뿐이다. 또 '동람도'에 나온 섬은 제주도·군산도·흑산도·남해·거제도·대마도에 불과하다.

통상도 중국과 일본에 한정됐다. 당시 일본은 북해도와 네덜란드, 중국은 동남아시아와 서양 각국과도 접촉하던 때였다. 장보고가 동남아뿐 아니라 이슬람 상인과 거래한 것과 비교하면 해양무역사 측면에서 커다란 후퇴였다. 또 중국과 조선의 강력한 해금정책으로 일본인들의 무역 욕구가 차단되면서 그들의 욕구를 불법적이고 약탈적인 형태로 표출한 것이 왜구의 침탈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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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서 임진왜란은 해양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일방적인 열세에서 벗어나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수군의 공이 컷고, 그동안 방기했던 섬들이 왜구들의 근거지로 활용되었다는 점 등이 반영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해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실학자들은 해금정책을 비판하며 바다를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박제가는 "조선 400년간 딴 나라의 배가 한 척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탄하고 바닷길을 활용한 통상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조선의 해양력은 갈수록 축소됐고, 섬과 바다, 연해지역을 왜구에게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오늘날 일본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였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은 독도의 존재를 몰랐고 설사 알았더라도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일찍부터 독도를 발견하고 이용해 왔으므로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울릉도 공도정책이 실시되고 있었을 때, 울릉도와 독도 모두 일본 어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며, 1618년 다케시마 도해면허, 1660년 마쓰시마 도해면허, 1836년 하치에몽에 대한 판결문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태종 때부터 시작된 '울릉도 공도정책'에 기인한다. 1884년 울릉도 개척정책이 실시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또한 19세기 말 서구 열강과 근대적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500년간 지속된 해금정책의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은 중화의 권위를 빌린 획일적인 안정성을 선호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해양 세력의 불안정성을 기피했다. 해양 세력은 다국적 성향과 자율성·독자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양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영토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1200년 전 장보고는 해양 네트워크를 잘 활용하여 동북아의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세계 각처에 거점을 만들고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를 창출했다. 오늘날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때를 맞이하여, 잠자고 있는 우리 민족의 개척정신을 다시 흔들어 깨움으로써 비로소 장보고의 해양강국의 혼이 부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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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ultural Highway at 20:31| Comment(0) | TrackBack(0) | Column | 更新情報をチェック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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