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교류】홍릉봉향회·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구마모토 한일심포지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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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교육회관에서 '한일의 과거를 직시하고 새로운 우호 협력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한일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이 심포지엄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주최하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구마모토지부·평화헌법 살리기 구마모토현민의 모임·구마모토현퇴직교직원등 연락협의회가 후원했다.

청일전쟁 종결 후,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 낭인'이라 일컬는 민간인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을미사변)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서양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그 범인들을 일단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시켜 놓고, 그후 재판에서 미우라 고로 등 48명을 '증거불충분'으로 방면했다.

이렇게 현대의 한국과 일본의 비극은 을미사변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가장 큰 이유도 '명성황후 시해죄'였다. 그런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하수인이었던 48명 가운데 21명이 구마모토 출신 청년들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2004년 구마모토의 교사 30여명을 중심으로 결성돼, 그 이듬해 소속 회원들이 명성황후 시해범의 후손들과 함께 명성황후릉 앞에서 사죄한 이후 매년 명성황후기신제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참배하고 있다.

PicsArt_06-03-07.21.28-2.jpg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후루사와 치요카츠 회장(왼쪽), 고종황제·명성황후의 제사를 총괄하는 홍릉봉향회 이동재 회장(오른쪽)

심포지엄을 주최한 후루사와 치요카츠 회장은 "2차대전 패전 후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사회 과목을 담당했지만, 과거 일본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그동안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점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 명성황후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은퇴하고 나서 처음 알았다" 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이 심포지엄을 기획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어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증손자인 이원(李源) 대한황실문화원 총재는 "올해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1807년 10월 12일 고종은 500여년에 걸친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끊고, 원구단(圜丘壇, 제천의식이 거행된 사적, 대한민국사적 제157호)에 올라 천제를 지내고 황제에 등극하며 자주독립국임을 선명했다. 올해 10월에는 일본에 의해 제거된 원구단을 서울시청 광장에 세우고 원구대제를 봉행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고종황제·명성황후의 제사를 총괄하는 홍릉봉향회(洪陵奉香会)의 이동재 회장은 "2015년 도쿄의 퇴직교원총본부 회원들이 명성황후릉 앞에서 뒤늦게나마 시해사건에 대해서 일본인을 대표하여 사과했다"며 "이 모임은 구마모토의 활동을 계기로 집회를 열게 되었으며, 앞으로 한층 친밀한 모임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금번 대한제국의 적통이며 고종황제의 증손자인 이원(李源) 황사손(皇嗣孫)과 함께 17명이 방일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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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총재(중앙), 후쿠오카공항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한일관계'라는 주제로 발표한 오사카대학의 이카이 다카아키 명예교수는 "1894년 한반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대농민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를 두려워한 조선 정부가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군의 개입을 촉발한 결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일본군의 왕궁 점령으로부터 시작돼 전쟁이 끝난 1895년 10월 왕궁에 침입한 일본인들에 의한 민비 시해사건으로 그 막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본 국민 전체가 일본 정부의 침략지향적인 대조선 정책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다야마 마사나카(田山正中)라는 인물은 정한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일본의 국내 문제를 이웃나라에 전가하여 해결하려는 수작이며, 조선을 정복해 우리 것으로 만들어 러시아를 막아보겠다는 속셈이다. 조선에서 내란을 일으켜 일본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일본의 태도는 열강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선의 인심은 '돈독한 신(信)을 좋아하고 의(義)를 견고히 지키며 그 기질의 아름다움이 실로 아시아의 으뜸'이라고 했는데, 이런 나라를 짓밟으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역설했다.

이와 같은 양심·지성운동은 구마모토에서도 활발히 일어났다. "구마모토 실학파라는 개혁파를 만든 요코이 쇼난은 퇴계 이황의 학문적 계보를 이어받은 인물로서 "의로운 나라와는 교역하되 그렇지 않은 나라의 요구는 단연코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야자키 다미조·야조·도텐 삼형제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탈아론을 주장하며 조선·만주 침략을 자극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생 동안 아시아 연대론을 주장하며 활동했다."

마지막으로 이카이 명예교수는 "구마모토에서 그간 13차례나 '명성태황후 사적 방문'이 실시되고 금년에도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바로 양심·지성운동의 계보 가운데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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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 회장

패널토론회에서 홍릉봉향회 이광용 부회장은 "비통한 역사를 알고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던 긍정적인 면을 재조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고종실록 36권에 기록된 명성황후의 인품에 관한 내용을 소개했다.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다. 자녀교육에 대해 열성적이며, 책을 중심으로 토론하면서 판단력을 기른다. 현모양처이며 주변을 잘 살펴 분위기 파악을 잘한다. 국모로서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천재지변 등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잘 돌봐주고 배려하여, 칭송과 신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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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봉향회 방일단은 3일 구마모토민단, 일본퇴직교직원연락협의회, 후쿠오카민단, 총영사관, 절신원(節信院), 정법사(正法寺) 등을 방문하여 우정을 다진다.

PicsArt_06-03-07.22.33.jpg왼쪽부터 오사카대학 이카이 다카아키 명예교수, 아시아뉴스 김금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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