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06

【민족의 봄을 찾아서】 민족계몽가 신석구 목사

日本語
3・1운동 33인 민족 대표였던 감리교 신석구(申錫九) 목사는 11세에 서당 훈장이 되었을 정도로 재능이 남달랐다. 33세에 기독교를 개인구원이 아니라 구국운동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독립선언서 서명을 권유받고 20여일 동안 새벽기도를 하던 중 2월 27일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代)에 잃어버린 것도 큰 죄인데, 네 대에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다"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한 후 서명했다.

그는 감리교단이 신사참배를 결의했을 때, 감리교 목사로는 드물게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당시 나라 형편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다니엘의 사정과 비교하면서 망국의 원인을 백성의 죄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다니엘의 경우처텀 우리 민족의 구국의 길이 하나님께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오! 하나님이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민족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따듯한 봄이 돌아와 만물이 발생하는 이와같이 우리의 생명을 다시 소생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다니엘의 의로움과 같진 않으나 구주의 의로우신 공로에 의지하여 구하옵나이다."

그는 회개는 윤리적인 갱신과 구체적인 생활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며, <신학세계>에 기고한 글에서
(1)자본가들은 성실하게 일하여 얻은 재물을 학교 설립에 투자할 것
(2)교육가들은 사욕에 매이지 말고 진실함으로 교육에 임할 것
(3)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처하며 십자가의 길을 가는 참된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 등을 강조하였다.

그는 각자 자기 본분에 충실할 때 구국의 길이 열릴 것으로 믿었다. 교육을 통한 민족혼 회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민족운동 노선은 '무장투쟁'이라기 보다는 '민족계몽'에 가까웠다. 그는 끝까지 비폭력 평화운동을 견지하였고 과장하기 좋아하는 운동가는 아니었다.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가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그렇다고 쇠하지 아니하고 낙담하지 아니하며."

3.1운동으로 2년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광복 후 평안남도에서 목사로 시무하며 반공운동을 벌이다 두 차례 투옥되었다. 월남하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어린 양들을 버리고 남하할 수 없다며 거절하다가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총살 순교하였다.

11046316_926670840698354_4696705081070433797_n.jpg
【남북분단과 통일】70년 포로 및 귀환시대
【한일교류】"너를 잊지 않을거야" 한•일수교 50주년, 故이수현씨 부친에 감사패
【한일교류】재특회 연구 / 야스다 고이치
【한일교류】재특회와 일베
【역사】야마토다마시이와 문제 해결 능력
【교육】동서양 사상 요가
【한일교류】일본의 고대사 컴플렉스와 한국의 근대사 컴플렉스
【베스트셀러】"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프레임」" : 「지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posted by Cultural Highway at 19:10 | Comment(0) | TrackBack(0) | 한일교류 | このブログの読者になる | 更新情報をチェックする
Comment
Write a comment
Name:

e-mail address:

Homepage address:

Comment:

この記事へのトラックバックURL
http://blog.seesaa.jp/tb/415158255

この記事へのトラックバック
RDF Site Summary
RSS 2.0